완벽한 반주 #09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한 한국의 여름에는, 탄산이 있는 음료만큼 시원한 것도 없죠. 단 음료를 즐기지 않는 저는 탄산음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 대신(?) 스파클링 와인으로 목을 축이곤 합니다. 돈이 무한정 나오는 지갑이 있다면 샴페인을 벌컥벌컥 마시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요술 지갑은 가지고 있지 않은 저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스페인의 '까바(Cava)'라는 와인입니다.
까바를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스페인의 샴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삼 스페인과 샴페인, 라임이 괜찮네요.) 물론 샴페인과는 들어가는 포도 품종도, 생산되는 지역도 다르다는 점에서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는 없지만, 만드는 방법만큼은 샴페인과 동일하답니다. 샴페인을 만드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스페인의 스파클링 와인인 것이죠.
까바와 비교해보기 위해 잠시 복습해보면 샴페인은 우리가 비교적 쉽게 접하는 품종인 피노 누아, 샤르도네, 그리고 생소할 수 있는 피노 뮈니에르를 주로 사용합니다. 반면 까바는 샴페인에 들어가는 포도들과 전혀 다른 스페인 토착 품종인 빠레야다(Parellada), 마카베오(Macabeo), 자렐로(Xarello)가 주요 품종이죠. 세 개 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품종들이지 않나요? 덧붙이자면 세 가지 품종 모두 화이트 품종입니다. 샴페인 3총사 중에서는 샤르도네만 화이트 품종인데 말이에요.
품종은 이렇게 닮은 점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가 샴페인을 마실 때 익혀두었던 지식들이 까바를 마실 때에도 똑같이 통용되는 것이 몇 가지 있어요. 알아두면 쓸 데가 많은 지식이니 이번 기회에 그 중 딱 두 가지를 설명해드리도록 할게요. 바로 '빈티지' 개념과 '당도' 표시입니다.
와인에서 빈티지라고 하면 포도가 수확된 연도를 말하는데요, 우리가 와인을 살 때 와인 병에 잘 보이게 붙어있는 연도가 바로 빈티지입니다. 빈티지에 따라 와인의 품질을 유추할 수 있고 가격도 달라지죠. 그런데 샴페인이나 까바를 보면 이런 연도 표시를 찾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병 구석구석을 뒤져봐도 있어야 할 숫자가 보이지가 않죠. 바로 '논 빈티지(Non Vintage, NV)'이기 때문으로, 균일한 맛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수확 연도의 포도를 섞어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사항은 있는 법. 예외적으로 특별히 작황이 좋았던 해에는 그 해의 포도만을 사용해서 와인을 만들기도 하는데, 까바의 경우 이것을 '빈티지 까바'라고 합니다. 보통 레이블에 Vintage라는 단어가 표기되어 있고 당연히 연도 표시도 찾을 수 있죠. (샴페인은 밀레짐(Millésime)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또, 당도 표시 또한 샴페인과 같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두에 제가 달지 않은 스파클링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 까바의 당도는 다양합니다. 샴페인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고맙게도 와인을 고를 때 자기 취향에 맞는 당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와인의 레이블에 당도가 표시되어 있답니다. 달달한지 아닌지를 표시해놓는다는데, 스위트(sweet) 같은 단어는 본 적이 없으시다고요? 맞습니다. 뭐든지 쉽게 가는 법은 없는 와인의 세계이니까요.
자, 아래의 스펙트럼을 한 번 외우면 이제 까바에도 샴페인에도 응용할 수 있으니 집중해봅시다. 가장 달지 않은 것부터 시작해볼게요.
브륏 나튀르(Brut Nature) - 엑스트라 브륏 (Extra Brut) - 브륏(Brut) - (여기까지만 해도 거의 달지 않고요) - 엑스트라 드라이(Extra Dry) - 드라이(Dry) 혹은 섹(Sec) - 드미섹(Demi-Sec) - 두(Doux)
와인샵에 가면 까바는 보통 브륏(당도 0-12g/L)이 가장 흔하고, 엑스트라 브륏이나 브륏 나튀르도 요즘 인기가 올라가는 추세라고 합니다. 단맛이 조금 느껴지는 엑스트라 드라이(당도 12-17g/L)나 드미섹도 종종 만날 수 있고요. 스페인어로 섹(Sec)은 세코(Seco)라고 해서 세코, 세미 세코 등의 용어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닮은 점이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샴페인의 향과 맛을 기대했다가는 조금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샴페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풍미를 까바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제가 샴페인 편에서 말했던 토스티한 향이나 풍부한 과실 향 같은 것들 말이에요. 이렇듯 샴페인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스파클링 와인 세계에서 샴페인의 입지가 엄청나게 높고 공고한 것이겠죠.
하지만 샴페인의 최대 단점이 있습니다. 바로 높은 가격. 이 단점을 까바는 완벽하게 커버합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 대비 퍼포먼스는 아주 훌륭하거든요! 까바를 마시면 후회하지 않을 TPO 몇 가지 소개해 드릴테니 까바의 매력에 풍덩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까바로 완성하는 완벽한 반주, 어렵지 않아요!
"푹푹 찌는 여름날, 시원하게 몸을 식혀줄 가벼운 스파클링 와인이 당길 때"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 날씨에는 무거운 바디감이나 너무 풍부한 과실 향을 가진 와인보다는 좀 더 상큼하고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 제격이죠. 일반 화이트 와인 중에는 말보로 소비뇽블랑이 그런 와인이었다면, 스파클링 와인 중에서는 바디감도 가격도 가벼운 까바가 딱입니다.
"스포츠 경기 중계를 앞두고 치킨을 준비했는데, 맥주보다는 와인이 당길 때"
요즘 같은 올림픽 시즌이나,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있을 때 항상 함께하는 친구가 있죠. 바로 치킨! 치킨은 으레 맥주와 함께 하지만, 와인도 충분히 잘 어울린다는 점 알고 계셨나요? 탄산이 있으면서도 상큼한 까바는 후라이드, 양념, 닭강정까지 모든 치킨과 잘 어울린답니다. 그리고 이게 무슨 향이고 맛인지 집중해서 마시지 않고 그저 즐겨도 되는 갓성비 와인이기 때문에, 스포츠 경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어요.
"매콤하거나 향이 강한 음식과 함께 먹을 스파클링 와인이 필요할 때"
저는 맵거나 향이 강한 한식이나 중식, 아시안 같은 음식에는 굳이 와인을 페어링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와인 말고도 다른 음료나 술은 많고도 많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와인과 함께 하고 싶다고 하면 가장 쉬운 선택지는 까바일 겁니다. 애초에 향이 그렇게 강렬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묻힐 향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탄산이 어느 정도 음식의 맛을 받쳐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떡볶이나 태국, 베트남 음식에도 추천드릴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