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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su Apr 22. 2021

<미나리>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Minari - A film by Lee Isaac Chung

‘데이빗, 뛰지 마’



문화와 문화는 생각하는 것보다 그 사이가 멀다. 그 원인은 길고 오래된 시간만큼, 넓고 넓은 공간만큼 많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무언가를 따지자면 언어일 것이다. 언어는 관념의 형성이고, 개인의 언어는 개인의 세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틀을 만들고 그 틀을 통해 나와 타자를 구분한다.


 

한편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고 벽을 세우는 것은 관념을 떠나 본능적인 것이다. 자신과 다른 무언가는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의 생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이 같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배척은 경험적인 것을 뛰어넘어 원시부터 내려오는 진화심리학적 요소다. 자신과 다른 것을 경계하는 건 생물의 본능이고, 그 경계를 가장 먼저 작동시키는 것은 아마 눈에 드러나는 외적인 측면일 것이다.


 

결국 본능적으로 인간은 나와 다른 것을 회피하고, 이는 차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변명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우리는 언어를 통해 그 다름을 결코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틀을 만들어 왔는데 어떻게 인간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결코 넘어설 수 없어 보이는 것들로부터 무언가가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관념은 특이하게도 자신과 다른 무언가에서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일종의 어떤 미적 의식이기도 한 이것은 최소한의 보편성을 담보로 내걸지만, 분명한 건 인간이 단순한 생존적 본능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자포니즘과 프리미티비즘을 추구했던 것처럼,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인들의 머릿속에 강력히 자리 잡은 것처럼, 다름이 신비한 무언가로 포장되고(어떤 방향으로 왜곡될지라도) 인간의 깊숙한 내면에 자리 잡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졌고, 그 이유는 예술이 끊임없이 다른 것을 추구하며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다 보면 누구든 머릿속에 어느 정도 미국에 대한 관념이 자리를 잡는다. 그것은 미국 문화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통해 이루어진 다기보다는, 경험에 의해 쌓인 일종의 보편적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이것이 단순히 익숙해진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건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예를 들자면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서울시가지 장면이 나올 때다.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의 형식이 지금까지 보던 배경이 아닌 서울이라는 배경에서 이루어질 때 어떤 불편함이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는 아마 도쿄나 홍콩이 아닌, 내가 언제나 보고 느끼며 내 세계의 한 부분으로 굳건히 만들어낸 서울의 모습과, 금방이라도 지나친 한글로 이루어진 간판들이 갑자기 미국이라는 다른 확고한 이미지에 침범했기 때문이다.


 

어떤 익숙함의 충돌로 인해 빚어진 이 특이한 경험은, 아마 서울이라는 관념과, 할리우드 영화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형성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나리’ 또한 두 가지 확고한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경험이 존재하는데, 이는 이질적인 불편함이 아닌 좀 더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다. ‘미나리’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지만 온전히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인 배우가 두 명 나오지만, 미국인에 의해 할리우드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한국인 배우가 두 명 나온다는 것, 특히 윤여정이라는 배우에 의해 이 영화는 이상한 경계에 서있게 된다.


 

윤여정은 한국영화의 작가적 기원과도 같은 고 김기영 감독과의 작업에서 시작해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는 배우다. 물론 사적인 배경에 의해 생략된 부분도 있겠지만 다분히 한국적인 배우인 윤여정은, 내게 매우 익숙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윤여정이 '미나리'라는 미국 영화에서 이 이미지를 전적으로 발현할 때, 나는 익숙함이 특별함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녀가 대사를 읊을 때, 아니 한 명의 사람으로서 발화할 때의 그 익숙한 말투, 그녀의 특별할 것 없는 익숙한 손과 표정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아득한 아련함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경험이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봐왔던 배경과 형식을 그대로 취하고 있고, 지금까지 익숙해진 것과 다른 건 윤여정과 한예리라는 두 배우의 존재뿐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이라는 배경이 불러왔던 이질적인 충돌을 벗어나, 모든 한국적인 것이 아련함이 되어 다가온다. 분명 나는 이민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이민자가 되어있고, 이 영화에 의해 어떤 따스한 햇빛 같은 사무침을 느낀다.


 

궁금한 것은 이거다. 과연 한국계 이민자들은 이 영화를 보며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까? 아니면 조금 다른 결을 느낄까? 나는 아마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미국인들이나 다른 외국인들은 이 영화를 보며 내가 느낀 이상한 노스탤지어를 느끼지 못할게 분명하다. 이 노스탤지어는 윤여정이라는 한국 배우와 미나리라는 미국 영화가 합쳐져, ‘우리 할머니’라는 너무도 한국적이고 사적인 이미지가 심적인 안식처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나와 비슷한 틀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에게도(아마 내가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 겠지만)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라는 이질성이 이 영화에는 분명하고 진실되게 담겨있고, 할리우드 영화 형식이라는 익숙함 또한 튼튼하게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성은 특수성을 띌 수 있으며, 특수성은 하나의 마중물에 의해 보편성이 될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 매력적인 보편성과 특수성의 경계가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인간이 다름을 배척하려 드는 본능을 우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덮어둘 수만은 없다. 그것이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분명 인간에게 불행한 운명을 선고하는 것과 같지만, 다행히도 인간의 관념은 보편성과 특수성 그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우리는 본능을 거부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이성적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다. 다름을 차별하는 것은 본능적이고 다름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적이다. 그것은 힘든 일이지만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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