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의 노래
나는 낭만가객이자, 초로(初老)의 신사인 최백호의 노래를 좋아한다.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엔 너의 웃음이
정든 우리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입영전야'를 부르며 마주 쥔 두 손에 사나이 정을 느꼈고,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군대에 갔다.
군입대를 앞둔 청년을 위해 마련한 술자리에서 마지막에는 모두 일어나서 막걸리 잔을 높이 들고, 거룩하게 노래했던 경험들이 다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옆에 있던 친구들은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다녀와라! 뭐 죽으러 가냐! 힘내라!" 하면서 격려했다.
그리고 군대 생활하면서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그의 주옥같은 노래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그쟈"를 들으며 청춘의 아픔을 나눴고 위로받았다.
최백호의 노래는 한 편의 시와 같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이 한 소절 한 소절이 마음 깊은 곳까지 와닿는 느낌이 너무 좋다.
가을남자, 고독과 낭만의 가수라고 불렸던 그가 부산 사나이답게 패기 있게 부른 '영일만 친구'를 즐기다가, 어느 날 탱고 리듬과 가사가 절묘하게 어울린 복고풍 노래를 듣고 "아! 이건 뭐야!" 하면서 한때 중독되다시피 들었던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였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 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2절은 더 처절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에 미련이야 있겠냐 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가 28세에 만든 '입영전야'를 듣고 그의 깊은 음악성에 놀랐는데, 리드미컬하게 노래한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니 노래 가사가 춤추듯이 내 속으로 들어왔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아름다웠던 첫사랑을 추억하며 어쩌면 이렇게 간결하고 슬픈 글을 쓸 수 있을까! 최백호는 가수이기 전에 타고난 시인이었다. 또 이 노래를 그가 45살에 만들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80세 노인이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같이 환갑이 지난 장년도 아닌, 40대 중년이 겉 늙은이처럼 "옛날식 다방, 도라지 위스키에 색소폰 소리" 에다,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 얘기까지 공감지수를 높여 그렇게 맛깔스럽게 노래 부를 수 있는가!
아주 오래전에 산울림의 '청춘'이라는 노래에서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피고 또 지는 꽃잎처럼"의 가사가 너무 슬펐고, 그 시절 방황했던 내 심정을 건드렸다.
왜냐하면 청춘의 희망을 얘기한 것이 아니고, 청춘을 그냥 보내는 우울한 곡이라 나는 예나 지금이나 청춘으로 살려고 노력하기에 시대를 너무 앞서간 그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102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 또 내년이면 모두 97세가 되는 백 부모님 등을 주변에 심심찮게 볼 수 있어 바야흐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백세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70대 초반인 최백호가 앞으로 20~30년을 내다보고 새로운 곡을 쓴다면 과연 무슨 노래가 나올까 몹시 궁금하다.
백호형! 멋진 노래 하나 만들어줘요!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