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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Feb 03. 2022

장인어른

장인어른

작년 가을에 처음 보는 휴대폰 번호가 떴다.

수화기 너머 "장인어른!  안녕하세요?  000입니다." 라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 나는 큰애가 결혼 날짜를 잡은 것을 깜박 잊고 하마터면 "누구신데요?" 라고 할 뻔했다.

그 당시 모친이 뇌경색 진단을 받아 우리 집에 거주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데이케어센터에도 잘 적응하지 못해 신경이 곤두섰던 때였으며, 또 개인적으로도 바쁜 시기였다.

"내가 장인이라니! "

순간적으로 살짝 웃음이 나왔고, 한편 갑자기 어른이, 아니 노인이 된 것 같아 실감 나지 않았지만 든든한 사위를 얻게 되다니... 아무튼 무척 뿌듯했다.

그 후 딸 부부가 몇 차례 우리 집에 왔지만, 이번 설날은 선물꾸러미를 들고 새해 인사차 방문하여 드디어 한가족이 된 것을 재확인하는 날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떡국을 맛있게 먹고, 새해 덕담을 나눈 뒤에 아이들이 갖고 온 결혼식 USB 영상을 보며 후담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 모친이 이런 명절에는 가족끼리 윷놀이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셔서, 거실 카펫 위에 말판을 펼쳐놓고 윷놀이팀을 만들었다.

팀은 딸 부부, 모자1(아들과 아내), 모자2(나와 모친) 3팀으로 구성되었고, 우리 노땅팀은 늙어서 흰색 말(바둑알), 딸 부부는 검정말, 그리고 빨간색 상의를 입던 아내는 빨간 말을 갖고 시작했다.

처음 연습용 한판은 우리 백마팀이 이겼다.

그러자 사위가 윶놀이를 재미있게 하자며, '영어 사용금지' 벌칙을 넣었는데 이는 게임 중에 영어를 말한 팀은 다음 차례를 놓치게 되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치매인 모친은 같은 백마팀인데도 불구하고 수시로 다른 팀을 응원했고, 그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 팀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치곤 하셨다.

또한 모두 윷판 주위에 앉았는데, 소파에 앉은 모친이 윶을 놓으면 거의 개와 걸이 나와 쉽게 잡혀 진전이 없는데, 이렇게 벌칙을 받아 순서를 놓치면 상대팀은 저만치 달아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상대팀도 예외는 없어 "오케이, 우리 팀"을 무의식적으로 내뱉었고, '백(Back)도'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뺄도'라고 우겼지만, 모두 눈물이 날 정도로 웃느라 게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모친에게 힘내라며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얘기한다는 것이, "엄마!  화~이~팅~ 하세요!"라고 하여 다들 박장대소하며 포복절도했다.

결국 우리 팀은 꼴찌를 하였고, 벌금으로 아이스크림 값을 내놓았다.

미리 준비했던 화투와 젠가는 꺼내지도 못하고, 오감 팡팡 윷놀이로 우리 가족은 함박 웃음꽃을 피우며 한 해를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사위사랑은 장모"라며 설음식을 준비하느라 고생했던 아내가 어깨가 뻑적지근하다고 하였다.

나와 아들도 증상이 비슷해 생각해 보니, 앉은자리에서 쉬지 않고 연속 3판을 윶놀이하느라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썼고, 올 한 해 웃을 것을 한꺼번에 소모해 기진맥진해서 그런 것 같다며 또 웃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보니, 사위에게서 문자가 왔다.

"장인어른!  어제 정말 좋은 시간 보냈어요. ㅎㅎ
윷놀이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ㅎㅎ"

내 입은 자연스럽게 스마일 로고가 되었고, 지금부터는 "사위사랑은 장인"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 같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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