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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나무 Jan 01. 2021

생기부의 불편한 진실

소심한 반항, 돌려 까기

학기 말이 되면 모든 교사가 작가가 된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수업 태도, 행동 발달 등을 관찰해서 기록해 주어야 하는데, 바쁜 일상 중에 누가 기록을 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대체로 모든 평가가 끝난 12월이 되면 본격적인 기록을 시작한다. 학기말이 학생들에게는 한가한 시간이지만 교사들에게는 전쟁처럼 바쁜 시기가 되는 이유이다.


생기부 점검일이 다가오면 작가가 마감일에 시달리듯이 머리를 쥐어짜며 문구를 만들어내면서 창작의 고통에 머리를 흔드는 동료 교사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수업시간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들의 경우 생각나는 내용도 많고, 실제 작성하고 제출한 보고서 내용도 훌륭해서 쓸 말이 참 많다. 오히려 내용을 줄이고 줄여서 바이트를 맞추는 게 일이다. 하지만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하는 학생들은 매 시간 잠만 자고 보고서 따위는 절대로 제출하지 않는 아이들이다.


"8차례의 활동 수업 중 모둠 구성원의 끊임없는 권유와 교사의 지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활동지  한 장 제출하지 않았으며, 모든 시간 일관성 있게 잠만 잠. 심지어 수행평가에 본인 이름도 적어내지 않아 미응시 점수를 주어야 할지 최하점을 주어야 할지 고민하게 함. 싹수없는 태도가 이루 말할 데가 없어 사회생활을 할 때도 분명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이며 단체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학생임."이라고 솔직하게 적고 싶으나 그래도 학생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이런 학생들의 활동 내용은 적어주지 않고 빈칸으로 두는 게 교사로서 최대한의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적어봐야 단점이 되는 내용이니 비워두고 상상에 맡긴다고 할까. 하지만 2020년도부터 주요 교과는 학생들 모두를 관찰해서 적어줘야 하며 빈칸이 있으면 안 된다고 지침이 내려왔다.


게다가 부정적인 문구를 적을 수 없고, 혹시라도 적었다가 민원이 발생할 경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누가기록과 증빙 자료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모두를 관찰해서 기록하되 긍정적인 내용, 발전 가능성이 포함된 문구만 넣으라고 한다.


잠만 자는 학생에게서 어떤 발전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이름도 안 쓰고 결과물을 제출하는 아이에게 어떤 배움이 일어났다고 써야 할까. 이 아이들에게 생기부는 필요하기나 한 것일까. 그래도 시키는 대로 긍정적인 내용을 적긴 적어야 하니 소심한 반항심으로 돌려 까기를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학생임." 번역하면, 이기적이라는 뜻.

"정기고사 시 문제지를 받기 전에 답안지를 작성할 줄 앎." 번역하면  문제도 풀기 전에 다 찍어버린다는 뜻.

"표현력이 풍부하여 교사의 말 한마디에 대응하는 수 가지 이상의 문장을 구상하는 능력이 뛰어남." 번역하면 말대답을 많이 한다는 뜻.

"감수성이 뛰어나며 감성으로 이성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음." 번역하면 감정조절이 안 되는 학생이란 뜻.

<출처 : 비공개 카페>


이런 식으로 돌려 까기를 하는 게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최선이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시간 개념을 좀 갖춘다면~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는 학생임."이라는, 즉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시간 개념이 없다는 말을 돌려 쓰고 있노라면 회의감이 몰려온다.


도대체, 왜 이런 식으로 적어야만 할까. 그냥 비워두는 게 배려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차라리 이런 아이들의 문구를 생각해 내느니 생기부가 정말 필요한 아이들의 생기부를 더 정성 들여 다듬어주고, 깊이 관찰해 적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배움에서 소외된 아이들까지 챙겨야 하고, 그들도 관찰해서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교사의 역할이라지만 그렇다고 문구 하나하나까지 교묘하게 비틀어 적는 것도 당연한 역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아이들에게도 긍정적인 내용을 적어주어야 입시에 유리한 현실이니 대충 써서 제출한 보고서도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작성함. 이라든가 "정성껏, 심층적으로" 분석함.이라는 식의 표현을 쓰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온정에 기대어 쓴다고 하더라도 정말 생기부가 수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1,2등급 학생들의 생기부는 확연히 다르다. 진심으로 하는 칭찬은 구체적일 수밖에 없고 글에는 마음이 담기는 법이라 일부러 포장하지 않아도 진가가 드러난다고 해야 하나.


따라서 이런 식의 평가가 입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큰 틀에서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입시와 상관없이 솔직하게 학생을 평가하고 냉정하게 서술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신뢰, 자율성도 제도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자의적 해석 능력이 뛰어나며 규칙에 대한 해석이 자유로움."


거짓말을 강요하는 시스템에 염증이 나지만 발전 가능성을 억지로라도 들여다 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계속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고 있다. (사실 발전할 가능성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닌가?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누가 좀 알려주면 고맙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진심으로 마음 깊이 모든 아이들이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글로 써야 한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상상과 기대에 부응하는 글이 아니라 솔직하고 공정하게 평가하고 싶다. 아니,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쓰지 않을 자유라도 보장 받고 싶다. 언제쯤 교사들의 당연한 바람이 실현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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