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 영어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 모임에서는 엄마들이 과제를 점검받고 어려움을 나눈다. 사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래서 어떤 모임이든 어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첫 순간, 차가운 공기를 나는 꽤 오래도록 기억하는 편이다. "어이, 신삥, 넌 누구지?" 하는 경계와 탐색의 눈빛이 동시다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컨설팅을 해주는 선생님께서 "오늘부터 새롭게 함께하는 00 맘이에요."라고 자기소개를 대신해주셨다. 우리 반 전학생처럼 괜히 움츠러든 자세로 구석진 자리를 대충 찾아 앉았다. 여기서 나는 '엄마표 영어'라는 새로운 세계에 갓 입문한 7살 00 이의 엄마일 뿐, 내 이름은 없었다.
다른 엄마들은 이미 수개월 이상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더니 알 수 없는 말들을 나누고 있었다. DK가 어쩌고 연따가 어쩌고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나 그 순간은 '내가 왜 여길 이제야 왔을까'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이 말의 뜻을 알게 된 순간, 너무 별말이 아니라서 웃음이 빵 터졌다.)
이 모임은 하면 할수록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고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에서 대화 주제의 90%를 차지하는 주체는 영어 공부를 하는 아이들인데, 코칭을 받는 사람은 엄마들이라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은 없다. 그냥 모두 00 이의 엄마로서 오직 내 아이의 영어를 잘 가르쳐보겠다는 목표 하나로 모여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니 얘기가 내 얘기다, 나도 딱 그런 맘이야!" 하면서 언제 경계했냐는 듯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산후조리원 동기들 같은 끈끈함이 생겨난다고 해야 하나. 조리원 동기들은 첫 만남에 가슴을 내어놓고 모유수유를 하면서 진통이 언제 왔는지부터 우리 아이의 응가 상태가 어떤지까지 수다를 떨 수 있다. 오랜만에 이렇게 뜬금없이 훅 들어오는 대화가 부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영어 코칭이 아니라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던 아이로 인한 고민을 서로 털어놓고 위로하면서 다시 잘해보자는 의지를 다지는 게 핵심인 것 같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몸부림의 대화가 신선하고 반가웠다."우린 잘할 수 있어요! 영어 실력이 느는 게 바로 보이진 않지만, 보이지 않아도 (이 방법이 맞다고) 믿어요!"라는 메시지와 격려의 분위기가 마치 교회 소모임 같은 느낌이었다.
코칭 후 일주일 동안 아이에게 보여줘야 할 DVD 5장과 육아서 1권, CD 2장을 빌려 나오면서 이번 주에 꼭 미션을 수행하겠다는 비장한 마음과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살짝 웃음이 나오려는 마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이렇게 엄마표 영어 한 달 차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프로그램이라는 게 별로 없다. 영어라는 언어에 친숙하게 하고, 엄마가 결정한프로그램이니 아이에게 무자비하게 들이밀지 않고 동의를 구하는 기간이다. 일명 '터잡기'라고 부르는 시기로 매일 1~2시간씩 영어에 노출을 시켜주면 성공이다.
QnA 1. 집중에서 DVD를 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둬도 된다. 우리가 아랍어 방송을 1시간 집중해서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아이는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에 잠깐 흥미를 보일 수 있지만, 곧 주위가 산만해진다. 그래도 이 시기에는 그냥 틀어두는 게 목적이다. 틀어둔 채로 슬라임을 만지거나 블록 놀이를 하거나 퍼즐을 맞추어도 상관없다.
한국어를 배울 때 수많은 한국어에 노출되었듯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면 된다. 엄마가 옆집 엄마와 수다를 떨고, 뉴스에서 어려운 말이 나와도 굳이 우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듯이. 그냥 내 버려두기가 핵심이다. "똑바로 앉아! 누워서 보지 말고 바른 자세로 봐! Sorry라는 말은 미안하다는 뜻이야"라고 참견하는 순간 망한다.
QnA 2.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고르나요?
처음에는 5개의 DVD를 다양하게 골라본다. 수준별로 1단계, 2단계 이렇게 나뉘어 있는데 굳이 쉬운 1단계부터 보지 않아도 된다. 학원은 단계에 맞게 노출시키겠지만 너무 쉬운 단어만 나오는 영상은 유치하다고 느낄 수 있다. 수준을 고려하면 현란하게 변신하는 로봇, 터닝메카드에 열광하는 아이에게 '방귀대장 뿡뿡이'를 틀어주는 꼴이 된다.
학원은 연령과 성별의 취향을 고려해서 목록을 만들겠지만 엄마표 영어는 내 아이 흥미를 100% 반영하여 완전 개별 맞춤식 영어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7살 우리 딸은 오빠들의 영향으로 다른 또래 여자 친구들이 좋아한다는 프린세스 시리즈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우리 아이의 최애 DVD는 PJ MASKS!
DVD를 5종류로 빌려와도 아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한두 개만 돌려본다. 여기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한국어 영상을 최대 절제해야 한다. 넷플릭스는 초콜릿 가득한 병을 식탁 위에 두는 꼴이라고 한다. (우리 코칭 선생님은 찰떡 비유를 너무 잘하심)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절제하지 않으면 영어 DVD에 흥미를 갖기가 어렵다.
넷플릭스에 다양한 애니메이션이 많다는 이유로 틀어주는 순간, 어느새 한국어 유혹을 참지 못하고 언어를 바꿔달라고 조르며 실랑이가 시작됐다. 매번 넷플리스나 유튜브는 영상 시청 시간이 기분 좋게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DVD를 틀어주면 설정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금세 포기하고, 한국어 영상은 안 된다는 엄마의 단호함을 알아차린다.
'심심하니 이거라도 보자'라고 하다가 영상에 흥미를 느낄 때 성공한다. 식상한 말이지만 시작이 반이다. 겨우 시작해 놓고 이렇게 노하우를 쓰는 이유는 절반쯤 성공했기 때문이다. (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