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밥 먹지 마!
10살, 아니면 11살 즈음이었다.
내가 가난이 준 상처를 처음 느낀 나이다.
우리 집은 부자였다.
아직은 짧은 내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그렇지 않은 채로 보냈기 때문에 실제로 당시 우리 집이 누리던 부(富)에 비해서 과장되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IMF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나라가 망해버린 1990년대 중후반이었지만 우리는 수억 원을 호가하는 자가주택에 살았고, 당시까지 이상하리만치 일하기를 좋아하던 아버지의 급여는 500만 원도 넘었으니 말이다.
자신이 받고 있던 급여의 풍족함에 비해서 돈 쓰는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던 나의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술을 자시고는 거실에 현금다발을 뿌려놓곤 했다. 지금도 현금다발이 뿌려진 거실의 풍경과 다음날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몇 번에 걸쳐서 돈을 세어보고, 지폐가 부족하면 파리채로 서랍장이나 소파의 바닥을 긁어대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
부족함은 없이 자랐으나 큰돈을 쓸 줄 모르고 자란 내 아버지에게 그런 촌스러운 허세는 자신의 금액적 가치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식이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예상하는 대로 우리 집은 망했다. 우리나라처럼 말이다.
아니 오히려 망한 나라가 다시 회복하는 시기에 우리 집은 망했다.
헛된 사업에 투자를 한 것도,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산 것도, 그렇다고 엄마가 사치를 부린 적도 없었던 것 같지만 마치 예정된 수순인 듯
우리 집은 망했다.
60평이 넘던 자가주택의 평수가 작아지더니 전세나 월세 같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우리 집'이라는 말을 대신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전세나 월세라는 말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 우리 집의 몰락 속도는 받아들이기 꽤나 버겁게 느껴졌다.
'텔레토비'와 '쌈장 이기석'이 H.O.T. 만큼이나 유명해졌을 즈음, 전래동화에서나 들어본 것 같은 '가난'이라는 단어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는 꼬마를 비웃기라도 하듯 매몰차게 다가와 박혔다.
마치 내가 가난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집집마다 보급되기 시작한 개인용 PC는 날 무척이나 주눅 들게 했다.
그 시절의 선생님들은 참 배려심이 부족했다.
초등학교의 숙제를 디스켓에 담아서 제출하라고 당연하게 던진 말은 나를 숙제를 무작정 거부하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아이로 만들었고, 내가 가진 의료보험증이 대다수의 친구들과 다른 색을 띠고 있었지만 그 의료보험증의 색깔과 학교 급식비 미납 간의 상관관계를 선생님들은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했다.
물론 크게만 느껴졌던 그 당시의 선생님들도 어렸던 것 같기도 하다.
가난이라는 단어의 의미
가난은 어린아이에게 참 많은 상처와 주눅이라는 것을 사은품으로 선물했고, 그 사은품을 모자람 없이 받아 챙긴 나는 진짜 문제아가 되어 갔다.
또래에 비해 너무나 급격한 변화를 겪은 나는 학교와 달리 집에서는 오히려 철든 아이가 되어있었다.
괜한 자격지심에 싸움을 하고, 선생님들의 요구를 거절하던 나는 집에서만큼은 철든 아이였다.
그런 '이중생활'이 능숙해졌던 잼민이 지킬 박사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썬더바론'이었다.
당시 KBS에서 방영하던 '지구용사 썬가드'라는 로봇물 만화에 나오는 착한 편의 두 번째 비중 정도를 차지하는 합체 로봇이었다. 자동차와 특수장비, 항공기 등의 각기 다른 객체로 활동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로봇으로 합체하는 모습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3만 8천 원.
초등학생에겐 상상해본 적 없는 금액
며칠 밤을 눈앞에 썬더바론이 아른거리는 채로 잠에 들었다.
썬더바론에 대한 나의 '간절함'은 집이 망해버린 상황에서 반찬투정이나 장난감을 사달라고 한 번도 조르지 않은 '철든 아이'이자 온 집안 친척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장손'에게 3만 8천 원짜리의 로봇 장난감이 과연 그렇게 과도한 요구인가, 그 정도는 마땅히 내가 누려도 되는 정당한 요구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나를 합리화시키고 설득시켜버렸다.
며칠 고민 끝에 내뱉었던 요구.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가장 떨리는 첫 번째 요구에 빨래를 개던 엄마와 누나는 크게 웃었다. 내 느낌으로는 며칠 동안 장난감 때문에 고민했을 장남의 모습을 귀여워하는 것 같았다. 분명 당시에 내가 느낀 것은 엄마의 긍정적 시그널이었다.
장난감을 사러 가기 전날은 그동안의 며칠 밤 보다 훨씬 강력하고 다른 종류의 떨림 때문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설렘이라고 하는 그 두근거림은 장난감의 가격이 3만 8천 원임을 미리 공지하지 않은 나의 불안함 따위는 우습게 지워버렸다.
"야가 와 이라노? 무슨 장난감이 이리 비싸노?"
30년 넘는 내 인생에서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고 아직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우리 엄마의 '부정적 소리 높힘'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생각이 의아스럽지만 당시의 나는 무척 당황했다. 내 상식으로는 당연히 구매를 권해야 할 것 같은 문구점 아줌마가 제시한 만 2천 원짜리 가오가이거 장난감은 또 다른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합체와 분리가 되지 않는 가오가이거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것은 썬더바론이지 그게 아니면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그 순간 엄마에 대한 배신감에 몸이 굳어버렸다. 내가 명절마다 엄마에게 맡긴 '나의' 세뱃돈은 고작 3만 8천 원이 아까운 금액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를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내 걸음이 빨라질수록 '썬더바론'을 갖지 못하게 된 이 상황은 현실이 되어갔고, 그 현실은 내 두 눈에서 물로 변해 흘러내렸다.
가난은 상처 주고 상처받는 것
세월이 흘러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가끔은 눈물이 나기도 한다.
'썬더바론'을 갖지 못한 아쉬움은 물론 엄청나게 크게 남아있다. 그 아쉬움을 군대를 다녀오고 20살보다 30살에 가까워졌을 때 엄마에게 말한 적도 있다. 물론 웃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한 것이었으나 그만큼 나에게 그건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내가 엄마에게 받았을 상처보다는 엄마의 상처가 나를 아프게 한다.
지금 생각으로는 고가이기는 했으나 '철든 아이' 노릇을 하던 장남에게 장난감을 사주지 못했던 엄마의 상처, 그리고 토라져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외면하고 돌아섰던 아들의 뒷모습.
내가 봤을 리 없을 나의 뒷모습과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에 새겨졌을 상처는 지금도 가끔 나를 아프게 한다.
이렇게 가난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도록 만들고, 상처를 입도록 만든다.
나는 그래서 가난이 참 싫다.
여전히 나는 부자가 아니고, 이제는 '가난'을 이유로 상처를 받는 일은 없을 테지만
20년도 전에 내가 받았던 상처와 내가 입혔던 상처는 지금도 나를 아프게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은 첫 기억은 그때였다. 처음은 항상 강렬하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서 선생님에게 받았던 밥을 먹지 말라는 말의 상처와 엄마에게 돌아서서 내가 주었을 상처.
그 상처의 이유는 '가난'때문이었다고 핑계를 찾아본다.
엄마,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