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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감자 Aug 03. 2022

05. 장애인시설 첫 출근

낯섦의 소용돌이

'장애인'이라는 말이 익숙한 사회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장애를 가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드라마, 그리고 앞서 몇 차례 미디어를 통해 노출된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장애를 극복(이라는 말을 무척 싫어한다.)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요즘이다.


내가 장애인 시설의 종사자가 된 시대는 달랐다.

불과 10여 년 전의 이야기지만 사전 속에 있던 '인권'이라는 단어의 존재를 자각하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다.

내가 자란 시대에 장애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무언가 가까이 가기 두려운, 나와는 다른,

그 누구도 장애인을 '사람'이라는 범주에서 제외하진 않았지만 그 누구도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장애인은 무언가 문제가 발생한 존재로 인식됐으며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이 장애인과 대화하거나 노는 것을 싫어했다.

지금 장애를 가진 분들과 장애인 가족들에게는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픈 말일 테지만 실제 존재했던 역사였다.

장애인과 대화를 하기라도 하면 마치 장애가 감기처럼 옮는다는 인식이 있던 시절이었다.


2년제 대학의 사회복지과를 졸업한 나도 그런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자격증으로 사회복지사가 되었고 '사회복지'라는 단어만으로 마치 무언가 숭고하고 희생정신이 있는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지만 사실 당시의 그릇된 시대상에서 전혀 전진하지 못한 종사자였다.



Photo by Hunters Race on Unsplash

내가 일하게 된 장애인 시설은 '중증장애인거주시설'로 30명이 넘는 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생활시설이었다.

40명 정원의 시설이지만 몇몇 장애인은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실제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은 35~6명 정도 되는 가톨릭 재단의 중소규모의 시설이었는데 시설장인 원장님은 교구에 소속된 수녀님이었다.

나는 무교였으며 그 사실은 채용면접에서 이미 밝힌 내용이었다. 취업이 급하긴 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취업을 하게 되면 성당을 다니겠다는 거짓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종교의 색채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곳은 아니었다.  전 직원이 한 곳에 모여 회를 시작할 때 때 '평화의 기도'를 올리거나 회의를 마치며 '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를 낭독하는 것  정도가 일반 직장과는 달랐던 것 같다.  원장수녀님을 포함한 수녀님들은 적어도 내가 근무한 기간 동안 나에게 종교를 강요하거나 불편하게 권유하신 적도 없었다.




'수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 자체를 만화 이외에는 처음 본 나였지만 그 '낯섦'은 금방 사라졌다.

수녀라는 분들도 이곳에서는 여느 다른 종사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일원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장애인은 달랐다.

나는 사회복지사를 정체성을 가슴에 안은 채 이곳으로 왔고, 내가 소속된 '생활재활팀'은 장애인과 24시간 함께하며 그들의 생활 전반을 보조하고 재활을 돕는 업무가 주어져있었다.

생활시설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외부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시설 운영의 전반을 책임지는 '사회재활팀', 그리고 장애인들과 24시간 함께하며 그들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는 '생활재활팀'

학교에서 내가 배운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사회재활에 치우쳐져 있었고 처음 맡게 된 직장의 업무들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내 업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그 대상자가 장애인이란 것은 나에게 큰 어려움이었다.


그들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우리 시설은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6명의 장애인이 한 방에서 생활을 하며 본인의 기호에 따라 침대 또는 바닥에서 생활을 했다.

남자인 내가 담당하게 된 남자 장애인들은 4개의 방에서 생활했으며 그중 2개의 방을 내가 담당하게 됐다.

장애인 개개인별로 그들의 식사, 투약, 배변활동, 일상생활 등을 기록하는 '일상생활기록지'가 있으며 행동 특성을 기록하는 '개인관찰기록일지', 그리고 IPP 기록지(IPP : Individual Program Plan)라고 하는 개별 프로그램 활동 기록지가 있었다.


내 업무는 이랬다.


- 08:30 : 출근, 업무 인수인계

- 09:00 : 전체 회의 참석

- 10:00 : 전체 간식 시간 준비(주로 녹차나 둥굴레차 또는 커피 같은 티타임이었다.)

- 11:00 : 점심 식사 준비 보조(씹는 것에 불편함을 가지는 장애인과 개인별 혈당 등 건강상태에 따라 식사 달랐다.)

- 11:20 : 점심 식사 보조(의외로 많은 장애인들이 스스로 식사를 했지만 보조가 필요한 장애인도 있었다.)

- 11:40 : 양치질 보조

- 13:00 : 오후 프로그램 진행

- 14:00 : 전체 간식 시간 준비

- 15:00 : 오후 프로그램 진행

- 17:00 : 남자방 샤워 지원(일상생활에서 보여지는 수행능력에 비해 샤워를 독립적으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반면, 여러 기능적, 지능적 어려움에서 스스로 샤워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 17:40 : 저녁 식사 보조

- 18:00 : 양치질 보조

- 20:00 : 저녁 요가 진행

- 21:00 : 취침 전 체온체크

- 22:00 : 생활실별 건강체크

- 23:30 : 개별 서류 작성

- 02:00 : 보일러 가동 / 취침 체온 체크

- 05:00 : 보일러 OFF / 생활실별 식수 준비(약물투여의 영향으로 정말 많은 수분을 섭취한다.)

- 07:00 : 기상/옷 입기 보조(생활시설 장애인들 간에는 옷을 혼자 입을 수 있는지 없는지로 어깨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 07:40 : 아침 식사 보조

- 08:00 : 양치질 보조 / 출근한 간호팀에게 지난밤 장애인의 건강상태 보고

- 08:30 : 출근자에게 인수인계

- 09:00 : 아침 전체회의 참석 / 퇴근




내가 처음 근무한 형태는 남자 3명, 여자 3명으로 총 6명이 한 조가 되어 24시간 동안 근무를 하는 형태였다.

24시간 근무가 끝나면 24시간 동안 휴무이며 다시 24시간 근무를 하는 이른바 '퐁당퐁당'근무였다.

그만큼 처음 장애인을 가까이 접한 내가 24시간 동안 장애인과 함께 있는 시간은 여러모로 힘들었다.


앞선 글에서 처럼 첫 출근은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을 했다.

그리고는 하루를 쉬고 곧바로 실무에 투입이 됐는데 그 당시 장애인 시설은 첫 출근자에게 48시간 동안 근무를 하게 하는 룰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 시설만의 특징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48시간 동안 근무를 하며 내가 소속된 조와 다음 근무조의 업무방식을 익히고 장애인들과 빨리 가까워지는 연습을 위한 취지였던 것 같다. 사실 이후로 48시간 근무는 우리 시설에서도 사라졌고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면 48시간 동안 근무를 하도록 해서 장애인시설에서 근무를 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빨리 나가떨어지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 같았다. 실제로 신규 종사자가 가장 많이 출근을 포기하는 기간은 첫 근무 이후였으니 말이다.


장애인과 함께한 첫 48시간 근무는 나의 미숙함에 어리바리하며 넘어간 시간도 많았지만 정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특히 오후 프로그램 시간에는 프로그램의 난이도를 조절하여 되도록 전체 장애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항상 프로그램 참여를 거부하는 인원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주도적으로 프로그램을 이끌기보다는 보조에 가까운 나는 그런 장애인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내가 장애인과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학과 생활을 하며 봉사활동이나 실습 등을 통해 만난 장애인과 나눈 말이라고 해봤다 인사말이나 '이쪽으로 오세요.', '도와드릴까요?' 따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내가 장애인들과 처음 '대화'를 해보고 느낀 점은 이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의견을 숨기는 경우가 많거나 과도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거나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맙소사!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의 대화 패턴이 소위 일반적이다라고 하는 '비장애인'의 그것과 다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할 때 힘들어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말이 하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닫아버리거나 하고 싶은 말은 솔직하게 모두 해내는 그들과 달리 나는 '사회복지사'라는 이상한 신념에 갇혀 그들과 대화를 하지 않고 '상담'을 하려고 했다. 지나서야 느낀 점이지만 상담은 나 같은 초짜가 함부로 시도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들과의 첫 대화는 오히려 신입인 나를 시설의 터줏대감인 장애인들이 교육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장애인들의 특성이나 종사자들의 성격과 사는 곳, 심지어 수녀님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는 그들에게 배웠다.  당시에 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대화들은 내가 앞으로 장애인시설 종사자로 근무하는 시간과 나아가 청소년지도자가 된 지금까지도 돈으로는 배울 수 없는 공부가 된 시간이었다.

Photo by Etienne Boulanger on Unsplash


 




군에 입대한 후 겪은 48시간에 비견되는 혼돈의 48시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이동하는 나는 4월이지만 나에게 너무 뜨겁게 내려쬔 태양에 온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물론 곧바로 내 전화기를 통해 울먹이는 고모의 말을 듣고 얼어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떡하니? 아버지 지금 돌아가신다...



나는 차를 타고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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