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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불꽃 Aug 07. 2020

엄마가 가셨다

#. Prologue. "나 이제 정말 다시는 안 온다"

#.살다 보니 참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일은 예측이 가능하여 어느 정도 준비된 마음으로 덤덤히 받아 들일 수 있는 반면, 

어떤 일은 전혀 예측할 수 없어 몰아치는 폭풍을 온 몸으로 맞서 이겨내야 하기도 하고,

무방비로 그 폭풍에 휩쓸려 나가기도 한다. 

온 몸과 마음으로 맞서 싸우다 더이상 통하지 않을 때는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내려놓음'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채 모든 것을 관망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포장한 '내려놓음'이 방임이고, 시간에 내 맡긴 '자연스럽게'가 무책임이라며

내게 벌을 주는듯, 가랑비는 소나기로, 소나기는 폭풍이 되어 켜켜이 묵은 그 감정이 내 마음에 

쓰나미가 되어 들이닥쳤다. 




2020년 3월 1일,

그날 엄마는 8년간 남의 집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 집으로 돌아가셨다.

셋째 아이를 출산한 이후부터 워킹맘인 딸이 안스러워 인천 딸네로 오셔서 8년간 육아와 살림을 도와 

주신 엄마가 세 손녀들과, 까탈스러운 딸, 그리고 너무 무던한 사위와 바람잘날 없는 반복된 일상을 

보내며 "이제 다시는 안온다", "나 내일 아침 첫 차로 간다" 며 짐을 싸고 풀기를 수십번, 


그날도 잠시 COVID-19로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의 육아를 핑계삼아 

잠시 공기좋은 강원도 집에 다녀오시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평일에 한번 쉬는 신랑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방문을 닫고 쉬고 있던 찰나, 

엄마가 오후차로 가신다며 터미널에 데려다 달라셨다.


그날따라 난 또 왜 유난이었는지, 평소 다니시던 터미널이 아닌, 다른 터미널로 예매를 했다.

집에서는 15분가량 더 멀지만 기존에 이용하시던 터미널 보다 이동시간이 짧기에, 

고속버스의 답답함을 싫어하시는 엄마를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그시기 냉전이었던 부부 사이에 이동 경로를 두고 작은 실랑이가 문 밖을 건너

고스란히 거실에서 기다리시던 엄마귀에 흘러 들어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그냥 흘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엄마의 뇌리에, 가슴에 쾅쾅 대못이 되어 박혀 버렸다. 


엄마는 수만가지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


'집안에 장모가 있는데 왜 내딸한테 큰 소리로 짜증을 내는거지?'

'장모를 터미널에 데려다 주는게 그렇게 귀찮다는 건가?'

'내가 가기를 바랬구나'

'내가 진작에 갔어야 했는데 눈치없이 너무 오래 있었어...'

'쉬는 날 대체 왜 저렇게 방문 꼭 닫고 나오지도 않고.. 뭐가 불만인지'

'내가 숨이 막혀 못 살겠다'

.......



터미널로 향하는 내내 차안에서 

"장모님~ 제가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다른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시다 오세요" 

"엄마 모셔다 드리는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잠깐 오해가 있어서 그런거니 

신경쓰지 마요~" 라고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 하는 내 마음을 눈치 채셨는지, 

공황장애로 수년간을 힘들어 하던 엄마가 이제는 모든 것을 비우셨는지,


"나는 이제 안 오니까 싸우지 말고 잘들 지내" 라고 말씀하신다.


그동안 여러차례 화를 버럭버럭 내시며 가시던 엄마의 모습과 사뭇 다른 톤과, 

뒷좌석에서 되려 내 마음을 위로하는 듯 건네오는 엄마의 메세지에서 나는 알아버렸다.


이제는 정말 엄마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엄마의 지친 8년 육아전쟁이 이렇게 씁쓸하게 마침표를 찍는 중이라는 것을..

그 마침표에 미움의 독소가 가득 차 지우개로 지우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것을..


2주뒤,

막내 아이가 할머니를 따라 가겠다며 함께 간 탓에 개학을 앞두고 아이를 데리러 내가 친정집에 갔을 때도

엄마는 함께 오시지 않았다.

늘 화가나실 때 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셋째 손녀 때문에 못이기는 척 마음을 풀곤 하셨는데

역시나..이제는 그 약발도 효과가 없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던 날 우리는 서로 뒤돌아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엄마가 가시던 날, 문밖으로 들려 나오던 우리 부부의 작은 다툼은 트리거가 되어 

엄마의 지난 8년 타지살이에 강렬한 마침표를 찍었다. 


엄마의 남은 인생은 딸과, 손녀들과, 그리고 사위와 오손도손 깨볶으며 살게 해드리겠다는 나의 다짐은 

혼자만의 욕심이었을까.

나의 마음은 배려를 위장한 엄마의 감옥살이었을까.

엄마가 계신 이집이 엄마집이고, 엄마 살림이고 그저 편히 지내시라 했던 나의 마음과 달리

우리집은 엄마에게 '남의 집'이었다. 

엄마는 아직 신랑에 대한 서운함, 미움을 끌어 안고 계신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것이 아니라, 날 위한것이라고 했던가?

엄마에게 지금 그런말이 통할리 없지.


'남의 집'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엄마에게 '공황장애'가 되었고, 

그 처방전을 알기 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내성이 생길만큼  물리적 작용으로 엄마를 통제해 왔던 신경안정제는 

결코 엄마를 낫게 할 수 없었음을.. 


유일한 치료제는 엄마의 이야기를 온전히 경청하고 인정하는 '공감'이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리고 이제야 오롯이 보인다. 친정 엄마의 마음이, 신랑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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