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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불꽃 Apr 11. 2022

마음구멍 1

#9. 내 이야기좀 들어줄래요?

[엄마의 마음으로.1]


  북적이는 딸네 집을 떠나 강원도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마흔을 넘기고도 결혼을 안한 아들이 내가 딸네 집에 가 있는 동안 혼자 살기에 익숙해 진 것인지 내 집에 왔는데 왜 내가 가시방석인지 모르겠다.

아들이 출근한 사이 점심을 먹고 씻은 그릇들을 엎어 두고 뒤돌아 보니 냉장고가 눈에 띈다. 일 하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을 냉장고 정리며 못먹을 것 같은 냉장고 음식들을 대충 정리 해 버렸다. 올 해 초 오랫동안 머물렀던 빌라를 떠나 이곳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할 때 기존에 묵은 살림 정리며 이사 준비는 나와 수시로 화상통화를 하며 아들이 혼자 했기에 구석구석 내 손길이 필요했다. 그래도 과거에 호텔메이드로 일했던 경력과 "엄마는 시대를 잘 타고 났으면 정말 잡지책에 나갈 정리의 신인데 시대를 잘못 타고 났어~"라는 딸의 말을 들어온 나였기에 아직 이사 후 정리가 썩 맘에 들진 않았다. 

아파트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엄마 말에 그동안 아들이 청약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너무 높은 층이거나, 이사할 시기가 맞지 않아 두세번은 미루왔었던 이사인데 이번에 당첨된 5층은 조용하고 그리 높지 않아 내게도 힐링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동안 그렇게 버리고 싶었던 묵은 살림들을 헤치우고 몇 안되는 소소한 새 살림살이들을 보며 이 생각 저 생각이 스치자 몸도 노곤해 졌다.

눈을 붙인것도 잠시, 달그락 달그락 쿠당탕탕 소리와 함께 분주한 발걸음으로 주변을 헤짚고 다니는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저녁인지, 아침인지도 모를 덜깬 정신에 눈을 비비며 몸을 추켜세워본다. 

"뭐하니?"

"엄마 찌개 끓이려고 하는데 냉장고에 있던 감자가 안보이네?"

"그래, 안 먹어서 싹이 올라왔더라. 아까 정리하면서 버렸어~" 

"하~~ 엄마는 왜 아깝게 자꾸 버리고 그래, 잘라내고 다 먹을 수 있는걸.."

"괜히 먹으면 탈난다. 엄마가 못 먹을만 하니 보고 버렸겠지, 너는 무슨 주방일에 이렇게 잔 소리를 해대니, 그리고 그릇좀 그냥 놔둬, 내가 다 알아서 치워놓을건데 뭘 그렇게 닦아서 싱크대에 들여 놓질 못해서 그래"

밤 잠을 설쳐 겨우 든 낮잠이 반가워 쪽잠이라도 자야 머리가 개운해 질 것만 같았는데 오자마자 살림살이에 잔소리를 하는 아들을 보니 내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결혼 한다고 얼마전에는 결혼할 친구를 소개하더니 왜 또 깜깜 무소식인지, 벌써 만난지 수년이나 된 여자친구였거늘 그동안 결혼 할 생각은 안 하냐 물어보면 알아서 하겠다는 말만 늘어 놓기를 여러번, 오늘 보니 아들의 손에 낀 커플반지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고서는 냉장고에 싹난 감자를 버렸다고, 베란다에 널어둔 자기 옷은 어쨌냐며, 왜 그릇들은 다 내어놔서 설거지 거리를 만드냐며 딸도 안하는 잔소리를 해대는 저 놈이 내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고 있다. 저게 지금 나이 마흔 넘은 아들놈이 결혼은 안하고 내일모레 칠십이 다되어 가는 애미한테 할 소리인지, 내가 공황장애만 아니면 어디 단칸방이라도 좋으니 제발 나가 살고 싶거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중에 여유돈 한푼 없는 내 신세가 처량해 미칠 지경이다. 

기력이 없어 누워 있으면 왜 운동은 안하고 하루 종일 누워 있냐고 잔소리 하는걸 보니 더 나이들어 치매라도 오면 그때는 자식들한테 짐만 되겠구나 싶어 벌써부터 속이 다 썩어 들어간다.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엄마가 아이들 봐 주면서 용돈도 제대로 못 드려서 죄송했다며 딸이 보증금을 보태며 이건 엄마 몫이라고 건넸다. 이 집도 분명 내 지분이 있거늘 집이 있어도 내 집 같지가 않고, 며느리가 있어 함께 사는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서인지 나이먹은 아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가시방석이다. 찜질방에 가면 결혼 안한 아들이랑 같이 사는것 만큼 피곤한게 없다던 옆자리 여편네들 수다가 무슨말인가 했더니 내 꼴을 두고 한 말인가 보다.

딸한테 전화하면 지랄 같은 성격에 지 오빠한테 전화해서 한 소리 할게 뻔하고 그럼 그 화살이 또 나한테 돌아올게 뻔하니 어디 시원하게 내 얘기 들어줄 사람하나 없다. 

말 하기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한잔 하며 놀기 좋아했던 나였는데, 호텔메이드 하던 시절 제법 스치는 남자들한테 눈길을 받고, 작은 키에 춤선이 예쁘다며 콜라텍에 가면 내 손 한번 잡고 춤 추자는 남자들이 줄을 섰던 나였는데 이게 무슨 지나가는 개똥보다 못한 신세란 말인가.


사실 아들이 원래 이렇게 무뚝뚝한 성격은 아니었다는 걸 알기에 다시 마음을 추스리며 회사 사람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는 아들에게 술 조금 마시고 오라며 인사를 건넨다. 

일찌감치 서울로 가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대학원을 가고.. 말 안해도 연고하나 없는 서울에 가서 뭔가 척척 해 내는것처럼 보이는 딸과 달리, 아들은 이곳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 어릴적 아들의 유일한 꿈이었던 축구선수의 꿈을 못하게 말리고 고등학생 시절 아빠 대신 가장 역할을 하면서 어쩌면 아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이곳에 머무름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직장을 다니며 연애를 하고, 20대, 30대에는 수도권으로 가서 일 할 기회도 있었지만 언제나 아들의 최종 선택은 이곳에 머무르기였다. 몇 년 전인가,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이직 하기로 한 회사가 말을 바꾸는 바람에 졸지에 직장을 잃고 헤매던 때 경제적 어려움을 겪더니 그때 부터는 절약이 몸에 베서 닳을 때 까지 쓰고 왠만해서는 버리지 않는 습관이 생긴 것을 딸을 통해 눈치만 채고 있을 뿐이다. 그저 저도 쉽지 않은 직장생활과 오랜 연애의 실패, 일찍이 혼자 된 엄마 걱정에 삶이 고단하겠구나 싶어 내 마음이 진정될 때면 무뚝뚝한 아들놈이 아니라, 우직하니 자기 할 일 성실하게 해내는 속 깊은 아들로 인정하곤 한다. 사실 살림살이에 잔소리 할 때 빼곤 부딪힐 일도 없다. 인스턴트에 내가 차려주는 밥 먹는 것 보다야 뚝딱 뚝딱 요리며 살림살이 살뜰하게 해 내니 그걸로 됐지 싶다. 


  아들놈과 아들의 경계에서 매일 같이 티격태격 하며 함께 지낸지도 1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잊을 만 하면 밀려드는 두통이 또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쉽게 가실 것 같지가 않은 예감이다. 다니던 대학 병원을 가자니 이제 서울로 가는 차를 타는 것도 내 컨디션이 따라 주질 않고 손녀 셋 봐주며 공황장애까지 안고 살아온 지난 세월에 이제 황혼 육아는 핑계고 아픈 내 몸뚱아리를 딸한테 맡기는 듯 싶어 이제 딸네는 가지 않기로 다짐 했다. 어찌되든 내 동네에서 해결해 봐야겠다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 나셨다. 동네에서 1시간 차를 타고 나가면 아산병원도 있는지라 굳이 서울까지 갈 이유도 없었다. 

커가는 아이들이라 이제는 큰 손녀들도 곧 중학생이 되고 내 맘처럼 되지 않는 나이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할머니인 나에게는 칭얼대고 기저귀 갈아 채우던 꼬맹이들인데 이것저것 챙기는 할머니 말을 잔소리로 들으니 이제 아이들도 내 손길을 필요로 할 나이가 지났다는 것이 괜스레 슬프다. 그래도 어째.... 여전히 학교 갈때 보온병에 물은 잘 담아갔는지, 너무 차갑지는 않은지, 양말은 깨끗한 걸로 잘 챙겨 신고 갔는지, 지 엄마가 바쁜데 애들 실내화는 지저분 하지 않은지, 비오는데 우산은 잘 챙겨갔는지, 우산에 가려 지나가는 차에 치이진 않을지, 엄마 아빠 늦게 퇴근하는데 문은 잘 걸어 잠그고 있는지, 저녁은 잘 챙겨 먹었는지, 라면 끓여 먹고 가스불은 잘 잠궜는지.. 여전히 나에게는 아들 딸 걱정과 함께 손녀들 걱정뿐이니... 

남들은 내게 뭐 그리 걱정을 하며 사냐고 미련하다지만 그토록 원망하던 아버지 어머니한테 그리웠던 사랑이었고 정이었기에 나는 그저 한없이 주고 싶기만 한 것을 어쩌랴.. 

내 마음에 이리 채워지지 않는 허탈한 마음이 점점 까맣게 타 들어가는 구멍이 되고 그 구멍이 커져 나를 애워싼다 해도 온통 내 머릿속은 걱정 뿐인걸.. 


그래도 그렇게 남들이 자식 걱정하지 말라던 얘기가 귓등으로도 안 들리더니 걷 잡을 수 없는 두통이 시작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건지 자식걱정이고고 뭐고 신이 있다면 내 머리통을 갈라서라도 그 원인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몸 외에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그 절박함으로 동네 종합병원의 이비인후과를 찾은 날 나는 의사선생님의 소견에 따라 심각한 부비동염으로 인한 두통임을 받아들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수술을 결정했다. 


  딸은 갑작스런 수술 일정에 업무 스케줄을 조정하지 못해 오지 못하고, 아들은 퇴근 후 나를 간호하며 그렇게 무슨 정신으로 버텼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일주일의 회복기간을 마친 후 나는 퇴원할 수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원인을 찾지 못해 지진부진 했던 두통과의 싸움이 그렇게 일단락 되나 했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수술 중 극도의 긴장감이 나를 잠시 살으라 놓아준 것이었는지 퇴원 후 부터는 뒷북을 치며 내 컨디션을 난리 부르스로 만들었다. 

밥은 돌 같아서 씹을 수가 없고, 제대로 음식을 못 먹어서인지 기력이 없어 일어날 때 마다 휘청휘청하는 것이 병원에 영양제며 수액을 맞으러 다니길 수차례.. 이제는 아들이 출근을 하면 덜렁 집안에 혼자 있는 것 자체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 사는 아파트 같은 단지에 촉새 같은 사촌 동생이 사는건 가끔 내게 찾아오는 유일한 대화의 시간이다. 텃밭에서 키운 상추를 준다며 내려오라 하고, 닭이 알을 낳았다고 출근길 집 앞에 계란을 갖다 놨다는 전화도 귀찮지만 반가운 참새라 거절 할 순 없었다. 그마저도 약 때문에 술을 못 마시니 술 마시는 사람 앞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것도 곤욕이라 슬슬 핑계를 대고 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술한잔 기울이기 좋아하는 동생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좋아하는 노래 한곡 뽑고 춤이라도 춰야 나도 스트레스가 좀 풀릴텐데 그냥 앉아 있으려니 영~ 못해 먹겠다. 동생이 눈치를 챘는지 요즘은 연락이 좀 뜸하다.

코로나에 문화센터들은 모두 문을 닫고 수술하며 병실에서 만난 60대 4인방 친구들, 그리고 이웃이자 사촌인 동생내외, 가끔 걸려오는 몇 안되는 지인들의 안부전화가 유일하게 남은 내 어두운 마음 구멍을 밝게 비춰주는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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