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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불꽃 Aug 09. 2020

엄마의 생애 첫 해고

#1. 손녀딸 간병하러 오신날

  큰 아이가 첫 돌을 보낸 어느날, 모세기관지염이 심해져 폐렴이 되자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워킹맘에게 육아는 언제 무슨일이 생길지 모른채 무방비 상태에서 온 몸으로 맞서야 하는 폭풍과도 같았다.

어제는 괜찮았던 아이의 증상이 내가 언제 괜찮았냐고 따지기라도 하듯 급격하게 증상이 달라졌다.


남은 휴가와, 시어머니, 고모찬스, 신랑 휴가 까지 모두 쓰고도 어떤 날은 도저히 날짜가 맞지 않아 지방에 계신 엄마께 이틀간 아이의 간호를 부탁 드렸다.

멀리서 딸아이가 혼자 아둥바둥 하고 있을 생각에 '오죽했으면 나한테까지 말할까' 싶었던 엄마가 흔쾌히 다음날 올라오셨다.


스물여섯에 결혼을 하고, 감사하게도 3개월만에 첫아이가 생겨서 그 이듬해 바로 출산을 했다. 그런데 육아휴직은 커녕, 출산후 3개월만에 복직하여 회사까지 계속 다닌다니 모든 것이 엄마에게는 걱정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자기일은 알아서 척척 하는 딸이었기에 그런 딸의 요청을 엄마는 거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엄마는 작은 호텔에서 청소 업무를 하셨는데 아마 여름 성수기에 갑자기 이틀이나 휴가를 요청하니 호텔 관리를 담당하는 지배인이 흔쾌히 승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집안에 첫 손녀이자 그 어린것이 링거를 꽂고 있다는데, 그리고 딸이 더이상 휴가를 쓰기 어렵다는데 그럼 어쩌냐며 내가 가봐야한다고 말씀하신 엄마가 다소 찝찝한 승낙을 받고 병원으로 오셨다.

어쩌면 그날 엄마는 지금까지 일도 잘 해 왔으니 이 정도 배려는 회사에서 해 줄 수 있는 당연한 것 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일이란

엄마는 내가 어릴때부터 호텔, 콘도, 모텔 등 숙박 업체에서 일을 해오셨다. 덕분에 지금도 엄마는 여행을 가면 방 청소 상태부터 꼼꼼히 점검하며 평가하신다.

워낙 손이 빠르고 야무지셔서 어디를 가시든

욕실 청소며 침대 시트 교체도 혼자 척척 해내시고, 엄마가 청소한 방은 머리카락 하나, 고객 클레임 한번 없어 늘 관리자들이 칭찬한다고 좋아하셨다.



엄마의 직장생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 어느때보다 활기찬 목소리와 자신감 넘치는 에너지를 느낀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되던 해 아빠와 사별하시고 혼자 지내오셨으니, 그 시절 어느 직장상사가 엄마에게 호감을 보였다는 등 엄마의 옛추억에 젖다보면 '그래, 엄마도 여자였는데' 라는 생각이 스친다.

사회 구성원으로 스스로 경제활동을 해 나갈 능력이 있다는 것은 그 분야와 지위를 막론하고 엄마에게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뿌듯함, 그리고 인정을 통한 성취, 자존감을 갖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큰 아이 간병차 엄마가 다녀가시고 며칠 뒤, 엄마는 직장이 아닌 집에서 전화를 받고 계셨다.

호텔에 자리를 비운 이튿날, 관리자는 지역 신문에 구인공고를 냈고, 함께 일하는 동료로 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엄마가 관리자에게 어떻게 그럴수 있냐며 한바탕 분풀이를 하고 끝내 짐을 챙겨 나오신 듯 했다.

해고 였다.


내 일자리 지키자고 엄마 일자리를 뺏은 그날, 내 일자리와 아이를 보살피겠다던 나의 마음은 또 다시 엄마를 희생으로 몰아넣었다. 미안하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그저 "내가 거기 아니면 갈데가 없는 줄 아냐"며 신경쓰지 말라는 말씀만 하셨다.


요즘 엄마한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지도 말고, 너무 자식 걱정만 하지도 말고, 엄마 자신을 위해 엄마를 더 사랑하며 이기적으로 사세요"   

적어도 자식들한테 만큼은 꼭 그러시길 바랬고, 엄마에게는 필요했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이 얼마나 나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착한딸을 위장한 한없이 이기적인 딸년의 말이었는지.

건방 그 자체이자, 모든것이 어불성설이었다.


나 역시 엄마의 희생을 요구하며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가.

모든 엄마의 희생과 도움을 다 받아놓고, 이제서야 그런말로 엄마를 위로하며 챙기는척 하려 드는

나의 모순에 대체 어디까지가 내 마음에 옥의티 없는 순수한 의도일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가족 찬스를 쓰면서 정작 경력단절이 되는것이 두려워 내 일은 내려놓지 않고,

외벌이로는 살기 어렵다며 맞벌이를 꿋꿋이 지켜나가고 있으면서 엄마에게 그런 삶을 살지 말라니~

이 무슨 논리인가...



이후 엄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지만 퇴근이 너무 늦거나, 일이 너무 고되 힘들다며 한두달 일하시고

그만 두시는 등,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셨다. 그렇게 두해가 지났을까?


셋째 손녀의 임신 소식이 전해졌다.


맞벌이 딸네가 연년생인 큰아이, 둘째 아이를 종일 어린이집에 맡기고 매일 같이 등원 전쟁에 퇴근시마다 하원시간에 쫒겨 발을 동동 구르며 어린이집 원장님께 죄송하다를 달고 사는 모습을 엄마는 알고 계셨던 것일까?

아이들 눈치밥 먹는다며 제일 꼴찌로 하원 시키는걸 내내 마음에 걸려하시던 엄마가 드디어 구원투수로 나섰다.


누군가는

"사람을 쓰지 둘이벌어 다 뭐해~, 야간반 있는 어린이집을 알아보지~, 그냥 육아휴직 써~, 아둥바둥 살 걸 왜 애들을 그렇게 많이 낳았어~" 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나라고 내가 그렇게 아둥바둥 살줄 알았겠는가.

그럼에도 내게 태어나 가장 잘한일이 무어냐 묻는다면 당연 세아이를 출산한 일이다.)


아이를 셋 낳는 것은 우리 부부의 출산계획이기도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일하는 삶이 나의 삶이라 여겼다. 내가 선택한 삶이었기에 모든 것을 다 잘해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완벽하게!

나의 완벽은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내가 목표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당시 또래보다 일찍 결혼했으니 이왕이면 아이들이 컸을 때 젊은 엄마이면 좋겠고,

훗날 나의 친구들이 한창 육아전쟁에 시달릴때, 조금 더 홀가분하게 일에 매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일하는 엄마의 삶을 통해 아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배움을 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환상의 조합인가.  


더불어, 대학을 가면서부터 독립해 엄마와 떨어져 지내면서 함께 한 시간이 줄어든 것이 내내 아쉬웠는데, 지방에서 심심하게 지내시는 것 보다 손녀들 재롱보며 딸이랑 사위랑 오손도손 살아가고, 도심 속 문화활동도 즐기면서 좀 더 가까이에서 세심하게 챙겨드릴 수 있으니 엄마의 노년을 즐겁게 만들어 드리리라 나는 자신했다.

육아도움을 핑계로 신랑에게 친정엄마를 모시고 함께 살 수 있는 당당한 구실도 생겼으니 이 또한 얼마나 자연스럽고 좋은가.


셋째 손녀가 태어났다.

언니들과는 같은 듯 다른 듯, 엄마의 표현으로는 눈코입이 아주 올망졸망하고

특히 눈동자가 아주 새까맣고 총명하단다.

엄마와 함께 우리 다섯식구, 아니 정확히 3대가 모여사는 여섯식구가 만들어갈 행복한 일상을 꿈꾸며

엄마의 해고를 수십배에 달하는 가치로 보답해 드리겠노라 다짐했다.    

적어도 이때까지 엄마의 건강신호는 몸도 마음도 초록불이었다.


엄마의 도움더해지는 순간 여섯식구의 미래는 모든 것이 완벽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알지 못했다.

8년 후 엄마가 이번에는 해고가 아닌, 육아 사표를 던지고 떠날 것이라는 걸...

그 뒷모습엔 자신감 대신 쓸쓸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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