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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30. 2023

짜이 한 잔의 행복

제주 밤산책 일기 830

밤 8시.

온종일 내리던 비가 저녁이 되어 그쳤습니다. 

종이 가방에 몇 가지 자잘한 것들을 챙겨 들고 사부작사부작 길을 나섭니다. 

어젯밤 동네 친구와 약속을 했거든요. 산책길에 잠시 들리기로. 

그 친구는 마을에서 카레집을 하고 있습니다. 늘 다니던 산책길 중간 즈음에 있지요. 


어젯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카레집 친구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었죠.

원래도 왕래가 잦진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주해 온 데다 동갑내기여서 늘 마음이 가는 친구였죠.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자주 보진 않아도 왠지 친밀감이 느껴지는 사람 말이에요. 

코로나 이전에 잠깐 얼굴을 본 게 다였으니 몇 년 만의 통화였어요.


친구는 집에 가는 길에 저를 봤다며 오랜만에 안부도 전할 겸 연락했다고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전화에 반가운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잊지 않아 주어 고맙기도 했고요.

이런저런 얘기 끝에 얼굴이나 보자 해서 내일 산책길에 잠시 들르겠다고 했지요. 

마침 가게 문 닫을 시간과도 맞아떨어졌거든요.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경쾌하게 느껴졌던 건 아마도 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라 그랬나 봅니다. 

몸은 생각을 반영하는 그릇이라는 말에 심히 동의합니다. 


똑똑똑.

가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습니다. 

주방에서 뒷정리를 하던 친구가 돌아보며 "어, 왔어?" 인사를 건네자마자 몇 년의 공백이 순식간에 메워지는 듯했어요. 바로 어젯밤에 헤어진 것처럼 말이죠. 서로가 호들갑스럽지 않아 편안했어요. 그래도 변화된 것들이 많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1시간을 훌쩍 넘겼죠.   


선물이랄 건 없지만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몇 가지 넣어 갔던 것을 친구에게 건넸습니다. 작은 수건과 수세미, 행주, 차 티백 등 정말 소소한 것들이었죠. 따로 산 것도 아니었는데 좋은 선물이라도 받은 양 어쩔 줄 몰라하던 친구가 냉장고에서 짜이 한 병을 꺼냈어요. 

"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이거라도 집에 가져가서 마셔."

내일 장사를 위해 정성껏 끓여 놓았을 텐데 선뜻 꺼내주는 마음이 고마웠어요. 먼저 연락도 해주고, 그저 반가운 마음을 소소하게 전했을 뿐인데 오히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죠. 빈 병은 돌려줘야 해서 다음에 방문할 때 나눠 먹을 것을 꽉꽉 채워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늦은 밤, 친구의 마음이 담긴 짜이 한 잔 홀짝거리며 쓰고 있습니다.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지는 행복 충만한 밤. 

친구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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