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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Nov 12. 2023

오렌지빛 못을 품은 언덕을 걷다

오름이 있는 제주 여행 | 금오름

비바람이 세차게 분 다음 날.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 파란 마분지에 띄엄띄엄 솜뭉치를 붙여 놓은, 그림책처럼 예쁜 날이었다. 분명 노을도 근사할 터였다. 오렌지빛 하늘과 작은 못을 품은 오름을 만나기에 적당한 날. 주저할 것 없이 금오름을 올랐다. 

 

금오름은 제주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오름 가운데 하나다. 금악리 마을 남동쪽에 의젓하게 서 있는 오름은 예전엔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마니아들만 알음알음 찾아왔었지만 몇 년 전 이효리와 아이유가 석양을 보기 위해 올랐던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 단번에 스타가 되었다. 섬에서 몇 개 안 되는 화구호를 품은 오름으로 지금도 신비한 산정호수를 만나기 위한 발걸음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오래 미뤄둔 숙제를 마치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두었던 금오름을 다시 찾은 건 순전히 날씨 때문이었다. 전날 비가 내린 데다 흰 구름이 듬성듬성 떠 있는 그림 같은 하늘이 계속 눈에 밟혔다. 이렇게 좋은 날 금오름을 가지 않으면 여행작가로서 직무유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숙제는 빨리 해두는 것이 좋겠지.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들고 서쪽으로 달렸다. 

금악리 마을에 도착해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주차장은 꽉 차 있었다. 찾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지 전에 없던 카페와 푸드 트럭이 보일 정도로 한적하던 곳이 몇 년 사이에 핫플이 되어버렸다. 혜성처럼 나타난 금오름의 인기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금오름은 해발 고도 약 428m에 이르지만 실제 높이는 180m 정도에 불과해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정상에 닿는다. 비탈진 면을 곧게 오르는 임도(포장도로)와 지그재그로 난 숲길을 걷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해도 어려울 것은 없다. 여유 자작한 마음이라면 숲길을, 좀 더 빨리 오르고 싶다면 임도를 추천한다. 처음 찾았을 때 숲길을 가봤으니 이번엔 임도를 이용했다. 경사가 지긴 했지만 숨이 턱턱 차오를 만큼 힘들진 않다. 한숨 돌리며 뒤를 돌아볼 때마다 마을 전경이 조금씩 달라지며 풍경도 더욱 웅장해진다. 맞은편에 서 있는 정물오름을 비롯해 멀리 한라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거의 다 도착했다는 신호다. 여기서 몇 걸음 더 옮기면 움푹 파인 분화구와 작은 못이 내려다보인다.     


비가 오면 나타나는 산정호수

금오름은 남북 쪽 봉우리가 높고 동서는 낮은 원형의 분화구를 갖고 있다. 둥근 형태로 파인 분화구 깊이는 약 52m. 풀이 무성하게 차오른 분화구 안쪽에 하늘을 담은 물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윤기 나는 진초록 빛 카펫에 누군가 실수로 물을 쏟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느 오래된 책에서 봤던 ‘금오름에 백록담에 버금가는 못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젠 옛말인 듯 싶다. 백록담에 비유해 이름 붙여진 ‘금악담’은 예전에는 물이 화구호를 가득 채울 만큼 풍부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가뭄이 심한 때에는 물 한 방울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비가 내리고 나면 제법 연못 정도 되어 보이는 산정호수가 나타난다. 

처음 금오름을 올랐을 땐 물이 다 말라 버려 못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번엔 다행히 오롯한 금악담과 마주했다. 못이 작다고는 하나 오름 정상에서, 그것도 온전한 형태의 분화구 안에 물이 담겨 있는 모습이 매력적이고 신비로웠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못을 보기 위해 멀리서부터 찾아왔을 것인데, 어제 비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것이 되려 고맙게 여겨졌다. 이름난 포토 스폿답게 금악담 주변은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분화구 바닥으로 내려가 연못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모여 못이 되었다가 증발해 버린 후 다시 빗물이 되어 오름에 뿌려지기를 수십 만 번, 아니 셀 수도 없을 만큼 무한 반복해 왔을 타임 루프의 궤도에 선 기분이다. 끝없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혼자만의 시간 여행. 어디선가 갑자기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가를 헤엄쳐 가는 오리 한 쌍을 발견했다. 도대체 어디서 온 오리들일까. 뒤뚱거리며 오름을 올라왔을 것 같지는 않고, 설마 날아온 걸까. 알 수 없는 물음에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 마음도 노을에 물들고

분화구 능선을 따라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북쪽 봉우리까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바닷속으로 태양이 잠겨가고 있었다. 낮의 기운이 서서히 사그라들며 하늘과 맞닿은 바다까지 제 빛깔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 자리를 노을이 채우며 낮과 밤의 교체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강렬한 붉은색이 이내 부드럽게 번져나가며 수채화 같은 옅은 오렌지 빛깔로 물들어간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비양도 주변도 온통 노란빛이다. 여기에 한림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더해지니 한 상 잘 차린 노을 맛집이 되었다. 

어둠이 조금씩 스며들면서 희던 구름이 자줏빛이 되었다. 짙은 청색과 보랏빛이 환상적인 매직 아워(Magic Hour)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돌아서는 사람들마다 황홀함에 취한 눈빛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차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고요한 적막감이 채워지고 있었다. 깜깜한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히 떠 있고, 사람들로 북적이던 오름도 쉬어갈 시간이다. 산정에서 봤던 오리 한 쌍도 다정하게 잠을 청하고 있을 것이다.


제주 사진 명소의 원조 성이시돌 목장

금악리 마을에는 금오름과 쌍벽을 이루는 사진 명소가 하나 더 있다. 오름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성이시돌 목장이다. 오름을 오르기 전에 먼저 들렀다 오기 좋은 코스다. 1961년 아일랜드에서 온 맥그린치 신부가 주민들과 합심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목장을 만들었는데  한 구석에 테시폰이라 불리는 독특한 외관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이라크의 고대 도시 유적지인 테시폰의 아치 구조물을 본뜬 일꾼들을 위한 집이었다고 한다. 테시폰 자체도 그렇고 주변 풍경이 이국적인 느낌이 강해 제주에서도 가장 먼저 포토 스폿이 되었던 곳이다. 한 때는 웨딩드레스 차림의 커플들이 줄을 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한가해졌지만 이색적인 면모를 여전하다. 금오름과 함께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보통은 테시폰 주변만 둘러보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새미은총의 동산도 한 번 가 볼만하다. 공원처럼 잘 가꾼 산책길을 거닐며 힐링하기 좋은 곳이다. 예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성서를 토대로 세운 조각상을 찾아보는 일도 흥미롭다. 삼나무 사잇길을 올라가면 세미소오름과 삼뫼소라는 커다란 연못도 만날 수 있다.      

info. 

금오름 / 제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산1-1     

성이시돌 목장 / 제주 제주시 한림읍 산록남로 53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3년 10월 호에 게재된 기사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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