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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멀리스트 귀선 Aug 25. 2024

올 여름 에어컨 없이 살기

분명 낭만적인 여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2024년 여름, 그 해는 역대급 폭염이었다.


열대야도 최고 기록을 세우는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 우리는 에어컨이 없이 지냈다.
(미래의 관점으로 ‘그 해’라고 표현함)


자발적 선택이었지만 선뜻 기꺼이 한 선택은 아니었다. 에어컨이 없어서도 아니고 고장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설치를 안 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설치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여름이 오기 전 미리 에어컨을 설치했더라면 이런 낭만적인(?) 여름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몇 주가 걸리더라도 에어컨 기사님을 불러 예약을 했더라면 (폭) 여름 나는 방법을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름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여름 피부로 온전히 여름을 느끼면서 우리의 생존력은 30% 정도 높아졌을 것이다. 무더위에 싸우는 법대신 무더위 속에서 흐르는 땀과 함께 생존 방법을 연구했다. 그렇게 여름의 끝자락에서 잘 버텼다고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입추가 성큼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열대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에어컨 없이 살아보기의 시작은 에어컨 설치 시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가을쯤 이사를 앞두고 고작 몇 주 때문에 수십만 원을 들여서 에어컨을 설치했다가 철거했다가 다시 설치하는 비용이 너무 아까웠다. 어차피 무더운 한낮에는 집에 아무도 없고 주말엔 놀러 나가니까 이번 여름은 에어컨 없이 한번 지내보자라고 말한 남편은 과연 후회를 했을까? 나 역시 더위보다는 추위에 약한 터라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올해 여름이 역대급 더울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알뜰한 주부 마인드로 에어컨을 안 켜면 냉방비도 적게 나올 테니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여름 냉방비 폭탄을 여러 번 맛보았기에)


그렇게 시작되었다. 올여름 에어컨 없이 살아보기 작전이…

이번 여름은 정말 어마어마했다.(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함정이다.) 덕분에 밤마다 산책을 나가고 한 대밖에 없는 선풍기는 오후부터 새벽까지 열일을 했다. 냉풍기를 살까? 선풍기를 한대 더 살까의 유혹이 수도 없이 지나갔다. 이따금 카톡으로 남편의 유혹이 시작된다. 냉풍기 5만 원, 중고 선풍기 3만 원…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럴 거면 에어컨 기사님을 불렀지. 거실에 에어컨이 버젓이 서있는데 이번여름 우리의 선택으로 짐을 들이기는 싫었다. 남편의 유혹도 이내 자자들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해서 후회 중이라는 것을. 땀이 (매우) 많은 남편은 밥만 먹어도 소파에 앉아있기만 해도 땀이 났다. 빨래라도 너는 날에는 자포자기 상태로 땀으로 샤워를 했다. 집 한가운데서 회전 중인 선풍기를 조용히 안쓰러운 남편 쪽으로 고정시킨다.

-올여름 그 더위를 어떻게 버텼어?

-아무 생각 없었어. 아무 생각 없어야 해. 그냥 버티는 거야.


에어컨이 없으니 식단이 변했다. 최대한 불을 사용하지 않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요리들... 한 그릇 밥 혹은 수분과 영양이 가득한 채소과일 샐러드를 듬뿍 먹었다. 특히 낫또오이참치비빔밥은 우리의 올여름 최선의 아니 최고의 메뉴였다. 여름엔 챙겨 먹을 채소와 과일이 참 많다.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하기에도 제격이다. 식사가 단순해지니 설거지거리도 간편해진다. 잠시 에어컨이 없는 생활도 꽤 괜찮다고 위로해 본다. (살림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니까.)


아이와 나는 저녁을 빠르게 먹고 밤마다 산책을 나갔다. 어차피 집안에 있으나 밖에서 산책하나 땀이 나는 것은 똑같고 차라리 흠뻑 흘리고 시원하게 씻고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매일밤 나갔다. 오히려 밖이 조금 시원하다고 느낀 건 기분 탓일까? 동네 개천을 따라 걸으며 오리가족들도 만나고 서먹했던 길고양이가 애교를 부릴 만큼 우리는 친해졌다. 너무 더운 날에는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걷기도 하고 더 더운 날에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시원하다 못해 추위를 느끼며 빙수를 먹으며 더위를 아니 땀을 식혔다. 땀을 흘리고 돌아와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고 선풍기 앞에 누우면 에어컨이 없다는 것을 잠시 잊는 시간이 온다. 물론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이지만 말이다.

아마 집에 시원한 에어컨이 있었다면 우리가 매일 여름밤 산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름밤 천을 따라 걸으며 땀 흘리며 먹는 아이스크림 맛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시원한 집에서 먹었겠지만. 더워서 땀이 나도 7살 어린이는 밤산책이 좋다고 했다. 매일밤 산책을 나가서 너무 즐겁다며 얼마나 신나 했는지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오리 가족들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애교가 넘치다 못해 흐르는 고양이도 만나지 못했겠지. 여름이 무르익을수록 산책가에서 보이는 매미도 개구리도 두꺼비도 방아깨비도 송사리 떼들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름밤산책은 아이에게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을 것이다.


땀이 잘 나지 않는 나도 드디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났다. 특히 집안일을 시작하려고 마음만 먹어도 시작조차 하기도 전에 땀이 삐질삐질 나다가 본격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땀과 함께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한 선택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름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던지듯 빨래를 걷고 대충 접어서. 대충 가져다 놓던 어느 날 거실 한가운데서 상을 펴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를 보았는데 머리에서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런 아이 옆에 있는 것은 작은 가재수건 한 장이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며 땀을 한번 닦고 또 그림을 그리고 흐르는 땀을 또 닦고 그렇게 여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덥다고 짜증 낸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운 날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는 덥다고 짜증 한 번을 내지 않았다. 그저 땀이 나면 닦고 놀뿐 땀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산책을 했다. 오히려 나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고도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실 뿐이었다. 선풍기를 찾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에(나 혼자만의 감정) 회전 중인 선풍기를 조용히 아이 쪽으로 고정시켜 준다.


아이의 자기 전 루틴이 생겼다. 아이스팩 2개를 얼린다. 그리고 자기 전에 하나를 꺼내 가재수건에 곱게 싼 다음 베개처럼 그 위에 눕는다. (두 개를 얼리는 이유는 하나는 엄마 꺼라고 한다.) 남편은 아무 생각이 없이 최소한의 옷으로 여름을 나고 있다. 나는 물을 많이 마시고 장을 볼 때 수분이 많은 과일과 채소를 많이 산다. 오이, 가지, 토마토, 자두, 천도복숭아 등…


여름은 더운 게 당연한 건데 덥다고 낸 짜증과 불편함은 어느새 당연한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만의 무더위를 버티는 일상을 훗날 다시 생각해 본다면 분명 힘들었지만 2024년은 낭만적인 여름이었다고 기억될 것이다.(남편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와 아이는 여름밤 산책이 낭만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낭만이었다고 기억되는 것들은 조금은 힘들고 불편한 추억들이다. 올여름 내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낭만으로 기억할 것이다.



입추가 지나자 신기하게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살았다고 느끼는 순간 뉴스에서는 열대야가 다시 시작이라고 한다. 하지만 괜찮다. 무더울수록 우리의 여름 생존력은 상승할 테니까.


마지막까지 여름을 온전히 느껴봐야겠다. 파이팅!


그 해 여름 에어컨이 없어서 좋았던 점

냉방비 절약

탄소발자국 절약

식단의 간소화

살림이 조금 단순해짐

더위에대한 생존력이 상승

당연한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낌

추억과 낭만이 생겼다.


그 해 여름 에어컨이 없어서

더웠고 더웠다.


그 해 여름은 (분명)낭만이었다.


https://youtu.be/j5V33VCGjdk?si=QY-iN2nJoUVXuh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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