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딱 한번 모델을 한 적이 있다. 별생각 없이 지인의 영상제작 과정을 구경하기 위해 갔다가 담당 PD에게 무려 현장 캐스팅이 된 일이었다. 아마도 다시없을 이 경험을 하게 된 이유는 나의 지극히 평범한 얼굴도, 키에 비해 좋지 못한 신체비율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스텝들을 포함한 촬영 장소에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손이 가장 예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담당 PD는 내 두 손을 꼭 붙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의 출연을 강요했고, 어쩔 수 없는 분위기에 설득당한 나는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책장을 넘겼다.
사실 나는 손이 예쁘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릴 적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남자가 손가락이 크고 힘이 있어야 피아노 치기 좋은데... 얘는 손은 예쁘긴 한데 참..."이라는 푸념으로 나의 학습의지를 꺾어놓으셨다. 특히 어머니는 남자답지 못한 내 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서슴없이 돌직구를 날리시곤 했다.
딱 게으르게 생긴 손이야!
오랜만에 다시 보니 역시 별로 같다. 그때 PD가 참 급했나보다.
어머니의 이 말은 비단 내 손의 생김새 때문은 아녔을 것이다. 평소 나의 행동에 쌓인 것을 괜한 손에 대고 화풀이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게으른 천성으로 손이 이렇게 되었는지 손 때문에 게으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변명할 여지없이 나는 좀 게으른 사람이다. 좀 정확하게 말하면 닥쳐야 하는 타입에 가깝다. 요새는 나이만큼 요령이 늘어나 적당히 게으름을 유지해도 사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다 보니 개선 의지까지 점점 흐릿해져 간다.
천성은 이렇게 타성에 젖기 딱 좋은 사람인데, 마음 또 그렇지 않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불혹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할 생각을 하고 꿈을 꾸는 일은 꽤나 부지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위험 상황에 몰아넣기로 했는데,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 세상에서도 '현질'은 가장 쉬운 문제 해결 방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운동을 등록하고 여러 필요한 레슨을 선 결제했다. 그러니 여러 쌤들이 수시로 나에게 이번 주는 언제 만날 것인지 묻는다. 바쁘고 피곤하다고 하루 거르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면, 쌤들은 나에게 그러면 금전적인 손실이 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면 선생님들의 잔소리는 듣기 귀찮고, 금전적인 손실은 피하고 싶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인다. 최근에는 계획했던 프로젝트를 피곤하다는 핑계로 방치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관련 원데이 클래스를 등록해 다녀왔다. 숙제, 피드백과 수다(?)로 이어지는 굉장히 피곤하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역시 '현질'이 최고다.
두 번째 내가 위험상황을 만드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나를 그대로 보이는 일이다.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이야기가 통한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불혹의 꿈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꿈을 공유한 사람들 중 일부에게는 정기적으로 진행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기도 한다. 브런치라는 플랫폼도 원래 시작한 목적과 다르게 잘 활용하고 있다. 아무리 게으른 불혹이라도 쪽팔림(?)이라는 손실이 두렵다면, 뭔가 계속 해나가지 않을까?
위험 (危險) [명사] 해로움이나 손실이 생길 우려가 있음. 또는 그런 상태. <네이버 사전>
나는 지금도 위험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일을 닥쳐서 나름 또 해내고 있다. 주중 마감이라는 나름의 악조건을 부여했음에도 말이다. '데드라인'이라는 네 글자가 주는 자극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움직이게 만든다. 이러한 위험상황을 빽빽하게 채워놓는 것은 게으른 사람도 부지런하게 보이는 매력이 넘치는 방법이지만, 상당히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자칫 미끄러져 위험상황이 현실이 되었을 때 손실을 감수할만한 마음 준비가 필요하가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 용기도 없다면 게으른 불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