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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편] 코로나 시대 나의 험난한 싱가포르 입국기

트로피칼 디프레션


일 년 간의 입시 과정(?)을 끝내고 입국 절차를 진행해야 할 시기가 왔다. 싱가포르는 8월 초에 정규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나는 5월부터 매일 한국과 싱가포르 코로나 확진 건수를 확인하며 마음을 태웠다. 다른 국가에서 유학하는 친구들은 속속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판에 싱가포르로 출국하게 된 이야기.



입국 허가: 시작부터 쉽지 않구나     

박사과정을 제때 시작하기 위해서 학기 시작 전 싱가포르로 입국을 해야 했는데, 입국을 위한 서류 작업 시기가 한창 코로나 확진 케이스가 한국에서 폭발하던 시기와 맞물리기 시작해 전전긍긍하며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인은 사실상 싱가포르 입국 금지에 가까웠고, 영주권자와 장기 거주 패스 (pass) 소지자에 한해서 예외가 주어졌다. 싱가포르로 입국하는 외국인 신입생들은 싱가포르 이민국 (ICA)에 온라인으로 학생 패스 (student pass)를 신청하고, 지원자에게 특별한 불허 사유가 없으면 이민국에서는 IPA(In-principle-approval) 레터를 발급한다. 이후 학생은 IPA 레터를 사용하여 입국하고, 입국 후 추가 작업을 통해 학생 패스를 교부받는 것이 보통인데, 코로나로 인한 국경 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이제는 유효한 패스를 소지했어도  패스 성격에 따라 유관 부처에서 추가적인 입국 승인을 받아야 했다. 내 경우, 학생 패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발급되었으나 입국을 위해서는 교육부의 추가적인 승인이 필요했다. 국립대 소속 학생들의 경우 각자 소속 기관을 통해 여행 계획을 신청하고, 학교가 학생 명단을 교육부에 제출한 후 승인을 기다리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내 입국 신청은 2번 실패한 후 3번째 신청에 승인 되어 학기 시작 전 아슬아슬하게 입국할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핸드폰에 진동이 느껴지면 새벽에도 일어나 눈 비비고 메일 확인하다가 다시 잠드는 날의 연속이었다.      


트로피칼 디프레션의 입국 허가서. 개인 정보는 가렸다 @트로피칼 디프레션


듣기로는 특히 격리 숙소가 넉넉지 않았던 것도 입국 허가를 쉽게 받을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내가 입국할 20년 8월 당시에는 한국을 포함한 ‘모범 방역 국가’들이 지정되어 이 국가에서 온 학생들은 적합한 개인 거주지나 교육부가 관리하는 호스텔에서 자가격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은 이 명단에서 다시 제외된 상태이다). 나는 국립대 소속으로 교육부에서 관리하는 호스텔에서 국가가 보조한 저렴한 가격에 자가격리를 할 수 있었다. 일반 호텔 격리가 보조금 지원이 되어도 2000 SGD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는 데 반해 나는 총 690 SGD의 비용을 지출했다. 이는 2주간의 숙박과 식사를 포함한 격리 비용 490 SGD, 그리고 코로나 면봉 테스트 비용 200 SGD을 더한 가격으로 입국 전 미리 온라인 링크로 결제하도록 하고 있다.  



험난한 입국기: 내 한 몸 누일 곳 어디인가     

입국 허가를 받고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다시 한번 날짜를 확인하여 학교와 이민국에 입국 예정일을 신고한 후 예정된 날짜에 출국을 진행했다. 인천공항에서 체크인을 하며 IPA 레터와 입국 허가서를 보여주고 티켓을 발급받았다. 십여년동안 빈번하게 이용했지만 이렇게 텅 빈 인천공항은 처음이었다. 체크인 후 4개월 이상 해외 거주 예정자에게 허용된 최대치인 마스크 150개를 가져와 반출 카운터에서 신고하고 스티커를 받아 부착하였다.


인천공항에서 마스크 반출 신고 후 받은 세관 검사필 인증 스티커 @트로피칼 디프레션


나는 싱가포르 항공을 이용했는데, 예매를 진행하며 내가 지정했던 자리가 취소되고 항공사에 의해 임의로 자리가 다시 지정되는 일을 겪었다. 싱가포르에서 환승을 부분적으로 허용한 상태여서 추후 확진 사례가 발생할 시 추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환승객과 입국자들을 분리시켜 앉히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승객 자체는 많지 않았으나 비행기 뒷부분 반은 텅 비워둔 채로 탑승객들이 중앙 부분에 모여서 가는 상황이 되었다. 모든 승객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기내식을 먹을 때는 마스크를 벗을 수밖에 없었고, 밀폐 공간인 화장실도 몇 번 다녀왔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기내 서비스가 제한되어 특별한 요청이 없으면 헤드폰을 제공하지 않았고, 일부 주류 서비스도 함께 제한되었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싱가포르 슬링을 시켜 즐기려던 나의 계획도 무산되었다.


기내에서 나눠준 코로나 방역 키트(?). 손 세정제와 일회용 마스크, 소독 티슈가 포함되어 있다  @트로피칼 디프레션


소위 에어 트래픽이 없기 때문인지,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앞당겨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같은 비행기로 온 사람들과 함께 줄줄이 심사대 앞에 마련된 공간에 모이게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띄엄띄엄 배치된 의자에 앉아 대기를 시작하였는데, 직원 눈에 띄는 사람 순대로 대중없이 절차가 진행되었기에 나는 일찍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입국 전 온라인으로 제출한 전자 입국신고서와 입국 허가서, IPA 레터를 보여주고 금일 입국 명단에 올라 있는 나의 정보와 대조받는 작업이었는데, 나는 입국 사흘 전 제출했던 입국 신고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 공항 직원의 아이패드로 다시 입국 신고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한 시간 반 이상을 소요하고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 중 거의 마지막으로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싱가포르 땅에 들어섰다.      


입국 후 바로 진행할 것을 요청받은 몇몇 사항들과 싱가포르 정부의 자가 격리자 관리 애플리케이션 호머(Homer) 사용을 위해 현지 전화번호가 필요했다. 공항에서 심카드를 사지 못하면 이후 2주 격리 기간 중 구할 방법이 요원했기에 반드시 공항에서 구해 보리라고 마음먹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공항 이용객이 적은 탓인지 유심 판매처로 알려져 있던 곳들이 다 문을 닫은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미리 받은 격리 매뉴얼에 따라 싱가포르 정부가 허가한 다섯 개의 택시 회사 중 하나에 자가 격리자임을 알리고 택시를 요청하여 자가격리 장소로 이동해야 했는데, 로밍으로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었으나 최소 여섯 시간 전에 예약했어야 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입국에 얼마나 소요될지 몰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예약하고 기다리면 되겠거니 생각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텅 빈 입국장에서 나는 매우 난감해졌다.      


다행히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나처럼 혼자 남겨져 있던 한국인을 만났다. 유학원을 통해 사립대에 입학할 예정이라는 학생이었는데, 같은 유학원 그룹에서 이 친구가 정보를 받아 24시간 운영 중인 공항 내 편의점을 찾아 심카드를 살 수 있었다. 또한 이 학생의 유학원 네트워크는 택시 승강장에서 바로 택시를 탈 수 있다는 고급 정보를 주었는데, 내가 미리 고지받은 내용과 달랐기에 반신반의하며 승강장으로 이동한 후 자가 격리자임을 밝혔더니 정말 직원이 바로 택시를 잡아주었다! 택시를 잡아타며 급하게 헤어졌던 이름모를 친구야, 정말 고마웠어.     


무사히 택시를 타고 싱가포르 동쪽 끝인 창이 공항에서 서쪽 끝의 시설로 이동하며 바라본 창밖은 깜깜했다. 무성한 나무들이 어두운 하늘 위로 검고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문득 한국에서 석사과정 중이던 2016년, 싱가포르국립대의 지역연구소에서 두 달 간의 펠로우십을 하러 창이 공항에서 학교로 택시를 잡아타고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지금 나, 그리고 이 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길 위에서 나는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번외: 집에는 언제 갈 수 있을까?

싱가포르 가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창 밖 @트로피칼 디프레션


유학국과 연구 지역이 모두 아시아 내에 있었기에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박사 공부를 시작해도 방학마다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유학하는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싱가포르와 한국 사이에는 직항도 많고, 비행시간도 6시간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이 모든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전전긍긍하며 어렵게 출국해 보니 (특히 싱가포르 출국 후 재입국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는 한국에서 방학을 보내는 일이 요원해 보였다. 성인이 된 이후로 나와 살면서도 항상 나에게 ‘나의 집’은 부모님과 사는 본가였다. 한국에 있을 때는 다른 도시에 살아도 매주 금요일이면 집에 가서 일요일 밤늦게 돌아오곤 했고, 외국에 있을 때도 분기별로 한국에 돌아가 가족과 휴가를 보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며 나는 이제 집에 한동안 돌아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제 내 집은 어디일까 하는 상념에 잠겼다.      



*  '모범 방역국' 싱가포르의 교육부에서 제공한 격리시설에서 보낸 2주간의 격리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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