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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편] 14일간의 시설 격리기

트로피칼 디프레션

* 본편은 "코로나 시대 나의 험난한 싱가포르 입국기"와 이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택시를 타고 내가 배정받은 격리시설인 난양공대(NTU) 대학원생 기숙사로 이동했다. 나는 싱가포르국립대(NUS) 학생으로 입국한 것이기 때문에 국립대 소속, ‘모범 방역국’ 입국자의 조건을 충족하여 정부가 관리하는 호스텔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자가격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입국 전 메일로 안내받은 대로 택시 안에서 메신저를 통해 관리실에 내가 격리 장소로 가고 있음을 통보했더니, 도착하면 입구에서 큐알코드를 사용하여 체크인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택시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기숙사에 도착했다. 로비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경비원, 직원들이 나와 같은 비행기로 도착한 듯 보이는 학생들의 체크인을 돕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큐알코드를 스캔하고 내 정보를 기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배정된 객실의 호수가 문자 메시지로 도착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의 객실로 향했다. 힘들었던 하루 끝에 드디어 14일간 머무를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부모님과 친구에게 격리 장소에 잘 도착했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남기고 방을 둘러보았다. 방에는 침대, 책상, 실링 팬, 에어컨과 몇 가지 물품이 제공되어 있었다. 체크인 시 제공되는 1.5L짜리 식수 한 병 외에는 추가로 마실 물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물을 끓여먹을 수 있는 전기 주전자, 두루마리 휴지, 청소도구, 양동이, 세탁세제, 비누, 가벼운 스낵류, 커피와 차 몇 봉지가 눈에 띄었다. 베개와 침대보가 제공된다는 공지를 보았는데 방에 배치되어 있지 않아 관리팀에 연락하니 바로 시트를 가져다주었다. 요청이 누락되었는지, 베개가 모자랐는지 알 수 없지만 베개는 두세 번 정도 더 요청한 후 며칠이 지나 받을 수 있었다.


내가 격리를 진행했던 NTU의 Graduate Dorm 1 객실 모습. 밤늦게 도착했기에 첫날은 녹색 뷰를 감상할 수 없었다 @트로피칼 디프레션


이리저리 방을 둘러본 후 내 짐을 풀려고 보니 캐리어 잠금 부분이 망가져 있어서 캐리어가 열리지 않았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순간 어이가 없어 잠시 황망하게 서 있다가 이내 인터넷 검색을 통해 펜촉으로 지퍼를 찔러 물건을 빼낼 수 있었다. 팔을 휘적거리며 간신히 필요한 것들을 꺼냈으나 앞으로 2주간은 외출이 불가능하고 필수품 외에는 배달 역시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나중에 체크아웃할 때 내 짐은 어떻게 가지고 나가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이리저리 검색해 보다가 항공사에 영어로 이메일을 남겨 두었더니 싱가포르 공휴일과 겹쳐 조금 늦어졌지만 친절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 캐리어 파손 상태와 사진, 가격 등이 포함된 포맷을 작성하여 제출했더니 항공사에서 캐리어를 수리해서 다시 가져다주었다. 항공사 직원 방문을 위해 격리시설 관리팀에게 두세 번 정도 문의하고 (항상 한 번에 되는 건 없었다...) 방문 일정을 직접 조율해야 했다.


창밖 전경.  우거진 숲과 형형색색의 열대 조류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은 사진에 보이는 관측식 열기구(?)가 떴다. @트로피칼 디프레션


 첫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펼쳐진 초록빛에 힘들었던 기억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극한의 집순이인 나는 사실 격리 생활이 안정적이고 심지어 행복하게까지 느껴졌는데, 이 놀라운 뷰가 내가 2주간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격리기간 동안 나는 싱가포르 정부의 자가 격리자 관리 애플리케이션인 호머(Homer)를 통해 하루에 세 번, 나의 방 안에서 셀카를 찍어 체온과 함께 업로드해야 했다. 소속 기관인 NUS의 사회과학대학(FASS) 직원 중에서 나를 관리하는 사람이 배정되어 매일 밤 이 직원과 화상통화를 하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격리 둘째 날 밤 12시경, 자고 있다가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울려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받았더니 생판 처음 보는 남자가 화상통화로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전화를 끊었더니 계속 다시 전화가 와서 공포+경악스러움에 놀란 가슴을 감싸안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자가격리를 체크하러 전화한 NUS 직원이라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직원 G와의 매일 밤 화상통화는 참 어색했다. 실내에만 있으니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있는데 화상통화를 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고 내키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부스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워낙 교류 없이 실내에만 있다 보니 정이 들어 격리기간이 끝날 땐 나름 아쉽게 이별을 했다. 


싱가포르의 자가 격리자 관리 앱 호머(Homer)의 메인화면. 하루 세 번 체온 측정과 셀카를 첨부하여 격리 상황을 업로드해야 했다. @트로피칼 디프레션


자가격리 중에는 하루에 세 번, 식사가 문 앞 테이블로 배달되었다. 나중에 보니 격리된 시설에 따라 음식 퀄리티가 천차만별이었는데, 호텔 격리자들은 호텔에서 조리한 음식을 받는 경우가 많았고 서양 음식이 주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NTU 학생식당에서 조리한 것인지, 외부 도시락 업체에서 사 온 것인지 모를 심플한 도시락을 받았다. 점심, 저녁은 주로 싱가포르 스타일 아시안식, 아침은 빵이나 우유와 같이 간단한 식사가 제공되었다. 나는 워낙 가리는 음식이 없고 동남아 음식에 익숙하기도 해 아빠가 챙겨준 튜브 고추장이나 볶음김치 팩 등은 뜯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제공되는 식사를 세 끼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다. 생필품은 관리팀의 허가를 받은 후 그랩 등을 이용해 비대면 배달이 가능했는데, 옆 방 사람은 식사가 입에 안 맞았는지 매 끼니 라면, 피자 등을 주문해 먹는 것 같았다. 열심히 식사를 챙겨 먹고, 하루에 한두 번 홈트를 하고, 지도교수와 줌 미팅을 하고 개강 첫 주와 둘째 주 화상수업에 참여하다 보니 2주가 훌쩍 지나갔다.


격리기간 중 받은 도시락들. 심플해 보이는 메뉴들은 아침식사, 밥과 과일이 제공된 것은 점심, 저녁식사이다. @트로피칼 디프레션


체크아웃 날짜가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코로나 면봉 테스트를 하러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호텔 격리자들은 호텔 주차장에서 테스트를 받았다고 하는데, 교육부 지정 호스텔에는 '모범 방역국'으로 분류된 국가에서 온 격리자들이 있어서 그런지 각자 택시를 타고 요금을 지불한 후 지정 클리닉으로 이동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약속된 시간에 로비로 내려가니 같은 건물에 격리되어 있는 학생들이 택시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었고, 예약된 택시들이 도착하면서 차례로 클리닉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열흘만에 보는 바깥 풍경이 참 새로웠다. 정해진 동선을 따라 안내를 받으며 지정 클리닉으로 들어섰는데, 병원 직원 간 분업이 철저하게 잘 이루어져 있음을 느꼈다. 특히 메디컬 워커들이 정말 친절하고 프로페셔널했는데, 내 테스트를 담당한 분은 면봉 검사 절차를 차근히 길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최대한 살살 면봉을 콧속에 넣을 것이며 숨 쉬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나올 수 있다며 휴지를 뽑아 손에 쥐어주었다. 많은 배려 속에서 정말 조심히 검사가 진행되어 그런지 생각만큼 고통스럽지 않았고, 수월하게 검사를 마친 후 다시 택시를 타고 시설로 복귀할 수 있었다. 격리시설 로비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내 이름과 귀가 시간을 기록했다.


(좌) 자가격리자들의 이동을 맡은 택시. 운전석과 객석이 두꺼운 비닐 막으로 분리되어 있다. (우) 검사 시설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바라본 풍경 @트로피칼 디프레션


주말이 끼어 있어서 이틀 후, 그러니까 격리 해제일 하루 전 검사 결과를 문자로 받아볼 수 있었다. 음성이었다. 정해진 시간인 정오에 체크아웃을 하고, 그랩을 불러 예약해둔 내 숙소로 이동했다. NUS 기숙사도 상당수의 방이 정부 격리시설로 사용되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입생이 기숙사 입소에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숙소를 알아보아야 했다. 코로나로 인해 내 생활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을 떠나 주거가 불안정해지며 더욱 깊이 실감했다. 벌써 한 학기가 끝난 지금, 내가 입국했던 8월 초를 되돌아보니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불안하고 외로웠는지, 아니면 신기하고 재미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입국도, 수업도, 격리도, 숙소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는 생각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 그러나 싱가포르 서쪽 끝 어디에선가 격리되어 식수로 마실 보리차를 끓이고, 살아남기 위해 유튜브를 보며 하기 싫은 홈트를 억지로 하기도 하고, 통유리창으로 숲과 형광빛 앵무새를 하릴없이 관찰하고, 해가 질 녘엔 노을과 구름을 바라보며 직원 G의 화상통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리느라 먼저 잠들지 못하던 나의 특별했던 14일은 오랫동안 잊기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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