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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편] 코로나와 함께한 박사 첫 학기 이야기

트로피칼 디프레션



21년 1월 첫째 주 현재, 나는 이미 한 학기를 마치고 짧았던 겨울방학까지 즐긴 후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시 개강을 앞둔 상황이다. 늦었지만 전무후무했던 지난 학기, 싱가포르국립대 (NUS) 캠퍼스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 기록을 짧게나마 남겨보고자 한다.


일단 나와 함께 20년 8월 입학 예정이던 몇 명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입학을 미루었기 때문에, 두 명의 자연지리학 (physical geography) 전공 박사 동기가 있긴 했지만 인문지리학 (human geography)을 공부하는 박사과정생으로는 혼자 학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입국허가를 받고 꿋꿋이 격리를 이겨내며 학기를 시작했지만 필수 건강 검진, 단과대 오리엔테이션, 비영어권 국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NUS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영어 시험인 DET (Diagnostic English test) 등 주요 행사 및 일정들이 줄줄이 연기되거나 온라인으로 실시되었다. 영국식과 미국식을 섞어 놓은 듯한 싱가포르의 박사과정은 보통 첫 1-2년은 필요한 과목을 수강하며 코스워크 (coursework)를 수료해야 하고, 특히 내가 속한 지리학과의 경우 첫 1년 혹은 1년 반 동안 코스워크를 끝낸 후 논문자격시험 (qualification exam)과 연구윤리 검토 (IRB)를 거친 후 현지조사를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과정 수료를 위해 우리 과의 박사과정 학생들은 최소 6과목을 수강해야 하기에 나는 첫 학기 총 3과목을 수강하였는데, 2과목은 온라인으로, 소규모 방법론 수업 하나는 면대면으로 진행되었다. 후자의 경우 총 4명이 수업을 들었는데 개강 둘째 주까지 나의 자가격리가 끝나지 않아 수업 초기에는 나만 줌(Zoom)으로 생중계(?)를 당하는 경험을 했다. 학부, 대학원을 통틀어 거의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학생들은 대면 수업이 있는 날만 캠퍼스에 올 수 있었다. 학교는 각기 다른 구역으로 나누어져 운영되었고, 기본적으로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구역에만 머물러야 했다.


NUS 앱에서 캡처한 구역 정보. 지리학과가 속한 구역은 Kent Ridge 캠퍼스의 C 구역으로, 사회과학대와 중앙도서관 등이 포함되었다 @트로피칼 디프레션


학교는 교직원, 학생들의 동선을 관리하고 이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휴대폰 앱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NUS 구성원 모두가 캠퍼스에 오기 전 해당 앱을 통해 증상과 체온을 기록해야 했다. 대면 수업 등으로 캠퍼스에 방문하는 것이 허용된 날일 것, 증상이 없고 체온이 정상적일 것, 소속 구역 안에 있을 것 등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앱에서 그린 패스 (green pass)를 얻을 수 있었다. 스쿨버스를 타거나, 학교 내에서 음식과 음료를 구매하거나, 도서관에 입장하는 등 학교에서 거의 모든 행위를 할 때 이 그린 패스가 필요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속한 사회과학대에서는 대학원생 중 논문 트랙으로 입학한 연구생 (research student)들은 홀수/짝수 학번으로 나누어 면대면 수업이 없어도 각각 월, 수, 금 또는 화, 목, 토에 캠퍼스를 방문할 수 있게 조정해 주었다. 캠퍼스가 열리기 시작하며 나도 학과로부터 연구실 공간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도서관, 연구실, 식당, 카페 등 학교 내 모든 시설은 거리두기를 계속해서 엄격하게 준수했으며, 비워두어야 할 책상과 의자에는 테이프로 표시된 커다란 X자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좌) NUS 앱에서 확인가능한 트로피칼 디프레션의 safety profile. (우) 증상과 체온 신고를 마치면 얻을 수 있는 green pass @트로피칼 디프레션


싱가포르는 이미 내가 도착하기 전 약 한 달간의 서킷 브레이커 (circuit breaker)를 통해 강력하게 코로나를 통제한 상태였다. 그 덕인지 모르겠지만 치솟았던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의 확진 케이스와는 달리 지역 전파 케이스는 현저하게 낮은 상태로 유지되었고, 곧 학교는 연구생들이 매일 학교에 올 수 있도록 허가를 내 주었다. 코로나 상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학기가 끝나기 전 그 범위가 연구생이 아닌 코스워크 과정의 대학원생들과 학부생들까지로 확대되었고, 학기가 끝나며 구역 운영도 폐지되어 캠퍼스의 모든 구역을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내가 속한 구역이 아닌 곳에 있을 경우 경고 메시지가 뜨며 빨리 해당 구역을 벗어날 것을 종용하는 무서운 메시지가 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학교의 여러 시설을 이용하려면 증상과 체온 기록을 통해 그린 패스를 발부받아야 하는 상태이며, 학생 식당도 운영시간을 축소하고 일회용 식기로 바꾼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보통 싱가포르의 학생 식당은 푸드 코트 형식으로 다양한 코너에서 음식을 구입해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나는 팬데믹 속에서도 문을 연 몇몇 카운터에서 꼬박꼬박 점심을 사 먹으며 한 학기를 보냈다.


학생 식당에서 사먹은 음식들. 다문화 국가의 정석답게 인도, 중국, 일본, 한국 음식은 물론 무슬림, 채식 등 여러가지 옵션을 저렴하게 접할 수 있다 @트로피칼 디프레션


나의 수업 3개 중 2개가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학과 차원에서 매 학기 준비하는 새 연구생 환영회도 사상 처음으로 비대면 줌 (Zoom)으로 실시되어 학기 초에는 고립된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속한 연구 클러스터 모임 역시 매주 온라인으로 진행되어 지도교수를 제외한 다른 패컬티들을 만나고 알아갈 기회도 없었고, 다른 대학원생들을 만나 소통할 기회도 적었다.  특히 박사과정을 시작하며 (많은 선배들이 피해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해 준) 나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이에 따른 자괴감을 겪었는데, 이를 함께 나눌 동료가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싱가포르 상황이 점차 나아져 더 많은 대학원생들이 캠퍼스로 돌아오기 시작하며 동료들을 만나는 것이 내 생활의 큰 낙이 되었다. 특히 박사과정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길인지를 잘 알고 있는 박사 선배들은 이 전무후무한 시기에 홀로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나에게 많은 동정심(?)과 관심을 가져 주었다.


(좌) 대학원 동료들과 함께 간 칠리크랩 맛집. 5인 이하 규모의 모임으로 정부의 방역 규칙을 준수했다. (우) 선배와 크리스마스날 보타닉 가든에서 피크닉 @트로피칼 디프레션

 

싱가포르는 겨울방학이 5주가량으로 짧은 대신, 여름방학이 길다. 이번 겨울 방학에 한국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학기 중에 읽을 기회가 없었던 중요한, 그리고 매우 어려운 책들의 리딩 리스트까지 야심차게 만들어 놓았었는데, 어영부영 연말 시즌을 보내고 다음 학기에 수강할 독립 연구 과목 (independent study module)의 프로포절을 작성하고 나니 개강이 성큼 다음 주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다음 학기는 조금 더 면대면 수업이 많아졌고, 입학을 미루었던 많은 학생들이 싱가포르에 입국해 공부를 시작하는 만큼 저번 학기보다는 북적대는 학기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아직 개강을 하지 않았는데도 버스와 캠퍼스에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것을 느낀다. 백신 개발,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 등으로 아직도 마음 놓을 수 없이 시끌시끌한 상황에서 또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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