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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조 Mar 15. 2016

헬조선 청년이 덴마크를 만났을 때 #9

덴마크를 이해하는 핵심 두 가지

여행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처음엔 가격에 초점을 맞춰서 싼 가격에 다녀올 수 있는 여행을 찾고, 거기서 수준이 올라가면 장소에 초점을 맞춰서 유명한 곳을 찍고 오는 여행에 도전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지나 여행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그냥 자유롭게 떠나서 나를 돌아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여행을 하게 된다고 한다. 겨울의 로스킬데는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어디쯤 인지도 잘 모르는 이 한적한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 나중에 혼자 조용히 걷는 여행으로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우리의 패밀리 레스토랑과 비슷한 느낌의 식당이었다. 스테이크, 폭립, 닭고기 구이를 시켜서 나눠먹었다. 물가가 비싼 덴마크지만 고기와 맥주는 비교적 싸다.



점심을 먹으며 어제 호텔방에서 보았던 섬세하고 실용적인 공간 설계 이야기를 꺼냈다. 오전에 둘러본 학교에서도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었다. 공간을 만들 때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쓴 흔적들이 보여서 이곳은 뭔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 같은 테이블에 있던 욱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덴마크의 핵심을 정확하게 잘 본거라고 이야기해줬다. (그런 거 눈치채는 사람 별로 없다며.. 후후) 


덴마크에서는 공간을 만들 때, 특히 학교 같은 교육시설을 만들 때는 무척 깐깐하게 설계를 한다고 했다. 조명의 경우에는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광원이 직접 보이지 않는 간접조명 형식으로 설계하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의 나이에 따라 교실의 벽 색깔도 다르게 할 만큼 매우 세부적인 것 까지 신경을 쓴다고 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설계를 하고 충분한 협의를 한 후에야만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했다. 덴마크는 내가 생각했건 것 그 이상이었다. 


욱님은 나의 넘치는 진지함을 눈치챘는지 덴마크를 제대로 보기 위한 두 가지 핵심을 이야기해줬다. 하나는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 덴마크를 견학하러 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제도나 디자인을 보고 그걸 그대로 만들거나 따라 하는 데만 신경 쓴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무언가를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해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적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곳 사람들이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라 했다. 덴마크는 어떤 분야든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가며 긴 시간을 두고 뜻을 모으는 ‘숙의 민주주의’가 발달한 곳이라 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물들은 모두 그런 ‘숙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이었다. 그 숙의의 과정 - 의사전달의 방식과 체계, 합의를 만드는 구조와 과정 - 이 사실 덴마크의 진짜 핵심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핵심은 디자인에 담긴 철학이었다. 창의적인 학교 공간 설계로 유명한 덴마크의 대표적인 디자이너인 로잔 보쉬(Rosan Bosch)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녀가 말하는 디자인의 목적은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삶의 질을 끌어올린다


듣는 순간 ‘아, 이거구나' 싶었다. 이곳에서 눈과 귀와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 편안함과 매력의 정체,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높은 삶의 질이었다. 우리나라와 덴마크의 차이가 좀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디자인이란, 단순히 겉으로 멋지게 보이는 것이나 기능적으로 우수한 것을 만드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삶을 채우는 하나의 존재로서 의미를 생각하며 만드는 것이다. (애플의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덴마크는 건축이나 제품뿐만이 아니라 교육이나 정책 등 모든 면에서 '삶의 질’이 바닥에 깔려있는 사회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숙의와 삶의 질, 내가 우리 사회를 보며 계속 답답해했던 지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 점심 식사였다.


점심을 먹고는 두 번째 방문지인 로스킬데 고등학교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둘러본 동네 풍경이 참 담백하고 좋았다. 대단한 경치나 빼어난 건축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소박한 건물들 하나하나가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체 멋진 현재를 만들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동네의 풍경. 삶의 질은 심오한 게 아니다. 눈 앞의 거리 풍경이 삶의 질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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