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째날 저녁의 여러 가지 단상들
나는 음식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는 편이다. 보통 주면 주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먹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볼 때가 제일 힘들다.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나 같은 사람들을 '끼니를 때우는' 끼니파라고 부른다. (반대로 맛있는 식사를 챙기는 사람들은 ‘식사파’ 다.) 끼니파인 나에게 덴마크는 참 편할 것 같았다.
덴마크는 (우리나라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요리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고 음식들이 단순했다. 덴마크를 상징하는 음식은 오픈 샌드위치다. 열려있는 샌드위치는 민주주의적, 개방적 사고에 대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설명을 하는데 - 그렇게 치면 우리 비빔밥은 대화합의 상징이다 - 내가 봤을 땐 그냥 빵 위에 이것저것 올려서 쉽게 먹는 간단한 끼니였다. 뭐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단순한 식사가 좋았다. 특히 호텔의 아침 식사, 단순하지만 그날그날 마음대로 조합해서 먹을 수 있는 식사가 참 마음에 들었다.
셋 째날 저녁에는 덴마크에 와서 처음으로 한식을 먹으러 갔다. 그동안 샌드위치랑 고기 요리 다 좋았지만 간만에 밥을 먹으니 좋기는 했다. 오랜만에 둘러앉은 김치찌개 앞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도 끓어 넘쳤다. 특히 민호는 이때부터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이날 보았던 수학 시간 이야기부터 해서 한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사는 불합리함에 대해 거침없이 쏟아냈다. 가장 마음 아픈 이야기는 선생님으로부터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너희는 어차피 안된다’라는 말을 늘 듣고 산다는 이야기였다. 듣고 있는 어른들 모두 미안해했다.
요즘처럼 사람을 키우는 시스템이 다 무너져가는 사회에서 청소년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좋은 어른을 만나는 기회가 아닐까. 고민을 듣고 이해해줄 한 명의 제대로 된 어른만 있어도 청소년들이 성장을 포기하고 무기력해지지는 않을 텐데. 우리 사회에는 선생님이라는 역할이 있음에도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저리 상처를 주는 사람도 또 한편에서 다시 위로해주는 사람도 모두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왜 좋은 어른들을 이 먼 덴마크에서 만나고 있는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 저녁식사였다.
아,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을 뻔했다. 즐거운 저녁식사였지만 김치찌개가 1인분에 3만 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라면사리 추가는 2만 원이랬나.) 이 동네에서 김치찌개 4인분에 라면사리 하나 추가해서 먹었다간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지 않을까. 사랑합니다 대한민국.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서는 처음으로 혼자 거리를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우선 첫 목표는 근처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는 거였다. 요새는 구글 지도 앱이 워낙 잘 되어있어서 돌아다니는 데 별 걱정은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호텔을 나와 조용히 거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가게들은 거의 문을 닫아 길거리는 가로등만이 아늑하게 비추고 있었다. 간혹 술집에는 금요일 밤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눈 쌓인 거리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특별할 건 없지만 도시의 복잡함과 겨울밤의 고요함이 적당히 어울려 만들어내는 평화로움이 참 좋았다.
내가 간 마트는 Irma (일마)라는 곳으로 덴마크에서 제일 유명한 마트 체인이었다. 계속 공간에 관심이 꽂혀있는 상태여서 어딜 가던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단 입구에는 지하철 개찰구처럼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하게 게이트가 되어있는데, 처음에 공항 입국장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만들어져 있다. 사진이 없어 좀 아쉽지만 딱 보면 '여기는 들어가면 거슬러 나오지 못하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물건을 슬쩍 들고 나올까 하는 상상 자체를 차단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야채, 과일 같은 것을 파는 농산물 코너로 시작한다. 특이한 건 이곳만 별도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조명과 인테리어가 다르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 농산물의 방을 지나면 햄, 소시지, 치즈, 빵 등 이곳 사람들의 주식이 있는 코너로 연결된다. 거길 지나 방향을 입구 쪽으로 틀면 바로 계산대로 나갈 수 있고 공산품과 다른 것을 추가로 사려면 더 안 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마트는 입구에 보통 술, 과자 종류가 있고 농산물과 식재료는 저 안쪽에 있다. 먹을 것만 간단히 사려고 해도 긴 동선이 필요하고 이런저런 상품에 노출되며 지나갈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 유리한 공간인지가 다르다.
우선 마트에 온 가장 큰 목적은 치약을 사는 것이었으므로 치약을 찾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능한 made in 덴마크를 사려고 찾았는데 공산품들은 전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다국적 회사의 제품들이었다. 덴마크는 작은 나라여서 수입해서 쓰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찾다 보니 덴마크에서 생산한 유기농 치약이 있어서 그걸 사고 또 하루 허세 로운 밤을 위해 맥주와 안주로 먹을 감자칩을 샀다.
물건을 사고 나서는 시간도 남고 덴마크 사람들은 장 볼 때 뭘 사나 궁금하기도 해서 계속 마트 안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덴마크 사람 옆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뭐 다른 신기한 거 없나 찾아보기도 했다. (근데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매장의 구조 같은 걸 자세히 기억하게 돼서 이렇게 글을 쓰고는 있지만.) 아마 직원이 날 봤으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렇게 거의 마트가 문 닫을 시간까지 구경을 하다가 계산을 하고 나왔다.
이미 아는 분도 있겠지만 Irma는 동화 속 소녀의 얼굴 같은 로고로 유명하다. (위 사진 왼쪽에 보인다. 이 로고의 팬들이 많다.) 마트는 조명도 그렇고 상품의 포장 디자인도 그렇고 우리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전반적으로 자체 상표 제품들이 많았는데 로고가 이쁘다 보니 매장 분위기가 아기자기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장바구니도 인상적이었다. 들고도 다니고 끌고도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정리와 이동에 다 효율적이었다. 대신 장바구니 크기가 크지 않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장을 보러 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런 크기가 적당했다. 교통수단, 한 번에 사는 물건의 양, 장바구니 크기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 사회의 효율은 어느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마트를 나와서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근처를 걸어 다녔다. 코펜하겐의 고상하고 적막한 밤거리는 누군가 속깊은 이야기를 꺼내기에 좋은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