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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Aug 07. 2020

연애의 끝

나는 이 연애의 강자였다.

 길던 짧던 모든 연애의 끝은 힘들다. 그렇게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고, 나름 다양한 연애를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도 이별은 힘들다. 그러니까 어제는 툭하면 눈물이 쏟아져 나왔겠지. 그래서 오늘은 눈이 이렇게나 부어있는 거고.

 변해가는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꽤 힘들다. 분명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긴 한데 나 말고 다른 것들을 쳐다보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느낌. 그러다가 나를 한 번 봐달라고 건드리면, 걷는 속도가 달라지는 느낌. 그러다가 그 속도마저 완전히 엇나가게 될까 봐 더 이상 나를 봐달라고 건드리지도 못하는 겁쟁이가 되어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만큼 외롭고 약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없다. 인간관계 중에서도 나의 생활영역 깊숙이 들어오고, 나의 마음에 한 자리를 내어주고, 서로에게 기대를 하고 그로 인해 실망도 하게 되고. 그런 당연하지 않은 것들, 대단한 무리가 필요한 것들이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당연하게 기꺼이 이루어진다. 그런 무방비 상태 속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동안, 내가 가진 가장 여린 마음으로 상대방과 고군분투를 하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마음의 무게가 차이가 나게 되고, 더 사랑하는 쪽이 상대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한다. 처음 누가 누굴 더 좋아했던 그건 상관없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더 아쉽고 더 마음 쓰는 사람이 더 사랑하는 쪽이다. 그리고 나는 거의 모든 연애에서 그런 쪽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연애를 '잘'하는 법이 뭘까 종종 생각해본다. '잘'의 기준은 아무래도 저마다 다르다.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두는 사람도 있다. 대게 과거에 상처를 크게 받아본 사람일 확률이 크며, 자신의 마음을 온전하게 전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즉,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연애를 하는 것이 자신의 생활도 자신의 마음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애를 하는 사람. 분명 나는 그런 부류를 잘 알지도 못하고, 내가 지금 말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마음을 적당히만 주는 연애는, 매사에 쓸데없이 최선인 나에게는 하기 어려운 연애다. 혹은 끊이지 않는 연애를 하는 걸 연애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헌데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 그저 상대를 의존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나는 이런 '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혹은 연애에서 '갑'인 사람이 연애를 '잘'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할 말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거의 '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연애들이 잘 못한 연애였다고만 할 수는 없다. 


 관계에서 서로 집중하는 무게가 달라질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한쪽이 바쁘면, 다른 한쪽이 좀 더 신경 쓰는 정도의 상대성이 존재한다. 나는 이 정도의 상대성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갑과 을을 논의하는 것은 그저 귀여운 장난 정도로 이해된다. 하지만, 연애 전반에 걸쳐서 갑과 을을 논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쪽이 더 희생하는 그런 관계를 갑을로 표현을 한다면, 그 연애 관계는 이미 끝이 있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매사에 희생하는 누군가도 저마다의 기준선에서 한계에 다다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순간에 관계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되고, 대게는 한계에 다다른 사람들이 끝을 이야기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연애 중에 갑을 관계를 따지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다.

 연애를 '잘'하는 것에 대한 나의 기준은 이것이다.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 하는 것. 내 마음 다칠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내 감정을 속이며 이것저것 재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런 나의 연애 스타일이 목표는, 어쨌든 좋게 끝나던 안 좋게 끝나던 내 스스로가 혼자가 되는 그 시기에 미련이나 후회 같은 걸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더 쉽게 마음 정리를 할 수 있고, 그 순간들에 최선을 다했기에 이 끝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혼자인 시기에 술을 마시러 다닌다던가, 눈물을 흘린다던가의 감정적인 잔여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최선을 다 한 경우에는 그 잔여물들이 빠르게 사라진다. 그 감정 찌꺼기가 증식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청승을 떨면서 제대로 떨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최선을 다 하지 못했던 사람은 후회로 더 많은 부차적인 감정들에 언젠가는 한 번쯤 잠식되게 되어있다. 성격이나 감정의 어느 부분에 결여가 없다면 말이다.


 결국 나의 논리에 의하면 연애의 강자와 약자는 연애 '중'이 아닌 연애 '끝'에 가름이 나는 것이다. 그 혼자인 시간이 덜 힘든 사람, 관계가 진행 중일 때 최선을 다한 그런 사람이 다음 연애를 시작할 때도 더 온전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강자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이번 연애에서도 강자였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과 함께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후회나 미련이 없다.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싶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제 그 온전하지 못했던 관계를 당당하게 놓아도 된다고. 당신이 현명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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