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집 현관문은 한국과는 천지 차이다. 한국은 보통 번호를 입력해서 열고 닫는 자동 잠금장치라면 뉴질랜드는 거의 99프로 열쇠로 열고 닫는다. 그래서 항상 키를 주렁주렁 갖고 다녀야 하는 것이 큰 단점인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차키와 집 키를 항상 갖고 다니기 때문에 이를 불편하거나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열쇠를 카드지갑과 연결해서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됐는데 이걸 잃어버리는 순간,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내가 사는 집 현관문은 동그란 손잡이 가운데 배꼽 같이 생긴 작은 버튼을 누르면 문이 잠긴다. 그리고 열쇠로 밖에서 열면 딸깍하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린다. 그래서 집을 나갈 때는 배꼽 버튼을 누른 채 집을 나서고 문을 닫으면 잠기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생겼다.
여느 때와 같이 배꼽을 누른 후 신발을 신고 밖에 나간 후 문을 닫았다. 그러나 닫는 순간 아차 하면서 내 방에 자동차 키와 집 키 그리고 키와 연결돼 주렁주렁 이어진 카드지갑까지 놓고 나온 것을 깨달았다. 오전 9시 30분. 출근하는 데까지 30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당장 출발을 해야 했지만 차 키도 돈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현관문 벨을 여러 번 눌러보고 문을 두드려도 봤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혹시 창문이 열려있을까 싶어 담을 넘어 발코니로 가봤지만 아쉽게도 굳게 닫혀있어 소용이 없었다. 현관문에 바짝 서서 간신히 와이파이를 사용하며 집에 혹시 플렛 메이트(집에 함께 사는 브라질리언 가족)가 누구라도 있을까 싶어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도 없었다.
9시 50분. 평소 같았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이 거의 없어, 늦어도 상관없었겠지만 그날따라 사장님께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더니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 내가 급하게 일터로 와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일단 핸드폰 우버 어플을 사용하여 콜택시를 불렀고 10시가 다 돼서야 오늘이 2일 차라는 우버 초보 기사 차에 올라탔다. 20달러라고 해서 우버를 불렀는데 생각보다 길이 멀어서 그랬는지 28달러나 부과가 되는 참사를 겪어야 했다. 내가 1시간 일해서 버는 돈 보다도 훨씬 비싼 값이었기에 마음이 아팠지만 내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서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30분가량 우버를 타고 이동하면서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오늘 2일 차라는 우버 초보 기사를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그저 느긋한 척 창 밖만 바라봤다.
간신히 일터에 도착은 했지만 차가 없는 하루의 불편함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밥을 챙겨 오지 못해서 직장 근처 맥도널드에서 해결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차가 없어 맥도널드에 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갑도 없으니 햄버거를 사 먹을 돈도 없었기에 어쩌지 하고 고민하던 찰나 동료들이 내게 현금을 빌려주고 차키를 주면서 맥도널드에 다녀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인도인 동료 차키를 받아 그의 낡고 오래된 차를 몰아서 맥도널드에 다녀오는데 차가 너무 더럽고 차 안이 온통 인도 특유의 냄새로 진동을 해서 차를 빌려준 건 감사했지만 맥도널드를 갔다 왔다 하는 그 여정이 고되었다.
보통 3시에 회사 일이 끝나고 오후 4시부터는 한식당에서 일하는데 오늘따라 회사일이 늦어졌다. 원래 계획 같았으면 3시에 끝난 후 다시 우버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차를 끌고 저녁 일을 가는 거였는데 3시 30분에 그것도 간신히 서둘러서 끝난 탓에 집에 들를 시간이 사라졌다. 뉴질랜드인 동료는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 한 식당까지 나를 태워다 주었는데 차 안에서 쉴 새 없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머리가 조금씩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오후 4시.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한식당 사장님에게 문자를 했는데 다행히 동료가 빠르게 잘 태워다 준 덕에 늦지 않고 4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통 나는 아침에 양치와 세수를 한 후 대충 옷을 입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 후 로션과 선크림 그리고 입술과 눈썹을 바르는데 오늘은 이 과정이 통째로 생략되어 하루 종일 선크림은커녕 로션 한점 바르지 못한 맨 얼굴로 입술도 눈썹도 없이 다녀야 했다. 한식당 사장님에게 오늘 내 얼굴이 심각하게 초췌한 이유를 설명하며 밤에 일 끝나면 집에 좀 데려다 달라고 자연스럽게 부탁했다. 예상대로 사장님의 대답은 예스였고 나는 그래도 사람들이 다들 잘 도와줘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일을 시작했다.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아침에 키를 놓고 집을 나온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전날 저녁에도 생일이라고 친구가 사준 저녁이 뭐가 잘 못 되었는지 밤새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다가 새벽 3시가 넘어서 잠에 들었었7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일어나 키 없는 불편한 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사람들에게 계속 부탁하고 다니면서 두통이 가시질 않았고 이는 맥도널드까지 연속으로 체하면서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 한식당에서 같이 일하는 중국인 주방 아주머니가 알려준 지압은 효과는 있었으니 지속력이 약해서 밤 10시 15분 퇴근할 때 즈음에는 머리가 수박 통 깨지 듯이 쪼개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한식당 사장님이 태워다 준 덕분에 차 없이도 12시간을 일하고 집에 잘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하루, 스트레스, 소화불량, 수면부족, 과다업무로 하필 차가 없는 날 이런 것들이 몰려왔다.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류에 차 발명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차를 처음부터 안 썼으면 모르겠는데 차가 있다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오늘 뼈저리게 배웠다.
오늘의 교훈. 집 밖을 나가기 전에는 반드시 집 키, 차 키, 지갑을 챙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