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엄마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눈에는 아직도 내가 자유롭지 않아 보였나 보다. 나는 던져둔 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나의 엄마는 구순의 나이에 다가서지만 용감하다. 당신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시절을 나에게 조용히 들려준다.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기억이 안 난다며 둘러대지만 하나둘씩 글로 끄집어내고 보니 생각보다 견딜만하다. 글은 방패다.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 나의 안내자이다.
“그거 생각나?”
“아니 엄마”
“그게 생각이 안 나? 아휴 네가 그래서 살았나 보다”
엄마는 안타까워하셨다. 무엇 때문에 엄마는 내게 그 시절을 돌려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엄마는 이제 나를 예전보다 더 믿는다. 언젠가 거기서 살 때 그 동네에 있던 짓궂은 아이가 엄마에게 나를 일러바쳤다. 나는 순진하고 착하고 정겨운 아이였다. 적어도 내가 믿기에는.
“아줌마, 혜경이가 이랬어요!” 큰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 '전사'였던 엄마가 말했다.
“얘,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나는 우리 혜경이가 사막에 있다고 해도 이겨낼 아이라는 것을 믿는다.
네가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할 아이가 아니란다”
행복의 전제는 자유라고 한다. 자유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어릴 때에는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무기력한 존재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조차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부모가 그 작은 존재의 존엄에 대해 인식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태풍 같고 폭풍 같은 트라우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글쓰기가 개인의 존엄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이라고 믿는다. 내면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말로 내면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것은 어렵다. 가슴으로 글을 쓴다면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도 손가락이라는 마음도 생각도 없는 충실한 심부름꾼을 통해 술술 털어낼 수 있다. 글은 손가락으로 쓴다. 그러므로 아파도 조금은 떨어져서 멀리 깊이 자세히 가깝게 쓸 수 있다.
글에는 존엄과 영광이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읽기만 하면 벌써 작가다. 작가란 쓰는 것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존엄을 읽어내는 사람일 테니까. 그러므로 잃었던 존엄을 찾아서 떠나는 길은 글을 읽고 쓰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내 경험엔 무지해서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까. 무지하다면 나를 너를 지켜 줄 수도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자신의 존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존엄까지 지켜줄 수 있는 길이 바로 글쓰기다.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정의로운 길인 존엄의 길, 글쓰기를 한다. 그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나를. 그리고 너를 위하여.
"엄마, 걱정 마세요. 나를 찾아가고 있어요. 아무런 염려 말아요. 이젠! 지나간 일 때문에 고통받기보다는 지나간 일 때문에 풍요로워질 길을 찾을 것 같아요!"
"작가와"라는 곳에서 베셀 스터디 1기로 5주 안에 저만의 전자책을 쓰는 과정에 도전하고 있어요.
첫 주의 과제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썼습니다. 쓰고 보니 저는 저의 존엄을 찾기 위해 글을 쓰고 있군요.
작가님들 2024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더 쓰고 더 읽어서 우리의 존엄을 더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눈 깜짝할 사이에 앗길 수도 있는 나의 존엄을 지킬 책임은 자신에게 있을 테니까요! 아울러 이웃도 지켜주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