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이 시작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지 이틀 만에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우연히 서점에서 펼친 여행 잡지에서 산토리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같은 날 터키행 직항이 처음 생겼다는 광고를 보게 된 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필연 같았다.
가진 거라곤 여행 기간 길에서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돈과 공항에서 급하게 산 여행 책자가 전부였다. 비행기를 탄 사람은 ‘우린 지금 방황하고 있습니다.’는 그럴듯한 말로 그 시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두 청춘이었다. 대학 3년이 다 돼가도록 진로를 잘 못 선택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나와, 괜찮은 회사에 입사했었지만 개인 사업을 위해 그만둔 지 1년이 넘도록 일을 시작하지 못한 나의 언니였다. 나는 다시 시작할 용기도 없는 내 모습에, 언니는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자존감을 뭉개고 초라해져 있었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아테네로 가는 티켓을 구했다. 그리고 아테네 시내의 아무 여행사에서 산토리니로 가는 제일 저렴한 방법을 알아냈다. 늦은 밤 페리에 탑승해서 아침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우린 가장 낮은 등급의 좌석을 예약했다.
오랜 이동으로 지쳐있는 우리에게 나타난 거대한 페리를 바라보니 <타이타닉> 영화에서 주인공 잭이 도박으로 딴 티켓에 얼마나 많은 희망을 담았을지 괜한 공감이 갔다. 넓은 항구를 몇 바퀴 돌아 만난 한국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 겨우 5명이었다. 주변에서 그리스를 다녀온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로 서유럽이 유럽 여행의 대세일 때라 이런 곳에서 만난 것을 기적이라 여기며 우린 서로를 의지했다.
우린 약속처럼 모두 3등석 티켓을 내밀었다. 지도를 보고 여행하던 시절, 그나마 인터넷이 되는 곳이 있으면 여행카페에서 또는 길에서 정보를 얻어야 했다. 사전 조사 따위도 없던 터라 언니와 나는 밤새 페리의 갑판에서 지정된 자리 없이 아무 바닥에나 앉아 노숙해야 한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탑승 시간이 되자 3등석 사람들은 마치 전쟁터처럼 짐을 들고뛰었다. 그나마 2등석 칸으로 들어가는 문 앞이나 모두에게 개방된 휴게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 몇 개 없는 벤치를 차지하면 조금은 성공인 듯했다.
우린 벤치 2개와 큰 벽면이 될 만한 것 옆으로 나름의 요새를 만들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낭만이라고 하기엔 혹독했다. 손에서 담요를 놓치면 어둠에 빨려갈 것처럼 바람이 불었다. 소금기를 가득 먹은 바람을 따라 제멋대로 휘날리는 엉킨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꾸깃꾸깃 모아 잡았다. 바닷바람으로 몇 대 뺨을 맞은 것처럼 초췌해진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한여름이었지만 새벽의 한가운데,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밤새 떨어지는 기온 탓에 우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추위를 잊을 이야기를 해댔다. 취직, 휴학, 퇴직 같은 비슷한 이유로 모두 자신의 앞날에 대한 답을 찾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낯선 이들에게 받는 공감과 위로가 이렇게 클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바다도 하늘도 어디인지를 몰랐다. 동굴 속에 숨겨놓은 보석 상자처럼 사방이 검은 세상에 우리가 타고 있는 페리만 반짝거렸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막연한 희망으로 견뎌내고 있는 5명의 청춘처럼, 페리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어둠을 가르고 지중해를 항해했다.
도착하면 같은 숙소에서 지내자는 말이 오고 갈 때 즈음, 희미하게 날이 밝아왔다. 서서히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도 하늘도 천천히 각자의 색으로 깊어졌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여행자들의 피로와 기대감이 동시에 공기에 녹아 있었다. ‘새벽 여명이 이렇게 길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뜻해지고 있는 공기가 한결 한결 손가락 사이로 느껴졌다. 나는 그리운 광경을 만난 것처럼 설레었다. 모두가 서로의 감탄사마저 방해될 세라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바다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긴 어둠과 오랜 밤의 끝을 알리는 지중해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말보다 침묵이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지쳐있었지만 모두가 미소를 보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것만 같았다. 산토리니에 도착했다.
그날의 새벽을 만난 지 벌써 17년이 다 되어간다. 그 후로도 나는 몇 번의 어두운 밤을 만났다. 그때는 조금만 나아가면 다 보일 거 같았지만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지금도 앞이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두려운 시간을 극복하는 시간으로 채워지는 걸까. 나는 가끔 그날의 여명을 생각한다. 그날의 청춘들은 또 다른 여명을 깨웠을까. 우린 또다시 각자의 이유로, 움츠리기도 할 거다. 그리고 그때 그랬던 것처럼,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이 선택한 여행을 시작할 거다. 좋은 여행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