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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Oct 14. 2022

익숙한 남자

외할아버지는 은단냄새가 났다. 안방 왼쪽 구석 노오란 레모나 통 안에는 은단이 들어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구슬이 들어있었다. 할아버지는 가족과 겸상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하루 세끼 할아버지 독상을 차렸다. 어느 날 할머니에게 '둘만 있어도 할아버지랑 따로 밥을 먹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식사를 마치시면 기다란 베개에 허리를 기대어 누웠다. 배를 통통 두드리며 은단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할아버지는 건강에 크게 문제가 생기면서 술을 끊었다. 그때부터는 은단을 술처럼 마셨다. 할아버지가 입을 열면 은단 냄새가 났다.


오후가 되면 세탁소에서 드라이 클리닝한 깨끗한 옷을 입고 사우나에 가셨다. 할아버지한테서 깨끗한 냄새가 났다. 드라이 크리닝한 옷에선 따뜻하고 안전한 냄새가 났다. 사우나를 다녀오면 남자스킨 냄새가 더해졌다. 같은 공간에서 평생을 함께 산 할머니와 할아버지인데, 할머니는 비릿한 바다 냄새로 기억하고, 할아버지는 깨끗한 냄새로 기억한다.


외가댁에 갈 때면 엄마는 율무차와 통조림 황도를 샀다. 할머니는 율무차를 타고 황도를 썰어서 앉은뱅이 상에 차려 드렸다. 그러면 배를 통통 두드리던 할아버지는 몸을 살짝 일으켜 맛있게 드셨다. 다 드시면 상을 옆으로 살짝 밀어둔다. 그럼 할머니가 치운다.


할머니를 먼저 떠나보내고 할아버지는 바로 치매가 왔다. 정정하던 할아버지가 자식들을 모두 알아보지 못하고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는 데 고작 1년이 걸렸다. 요양원은 공기가 무겁다. 아무리 환하게 불을 켜도 어두운 느낌이 든다. 어르신들의 사진을 알록달록 꾸며 벽에 붙여도 명랑하지 않다. 창문을 열고 있어도 상쾌하지 않다. 친절한 직원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살이 너무 많이 빠져 있다. 할아버지한테서 더 이상 깨끗하고 안전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냥 ‘할아버지 냄새’가 났다.


그날 엄마가 할아버지 손잡는 걸 처음 봤다.

“아버지, 나 누구 꽈? 명자 와수다. 큰딸 와수다.”


할아버지는 아기가 되어 있었다. 치아가 몇 개 남지 않은 할아버지는 큰딸이 입에 넣어주는 요구르트를 주는 대로 드셨다. 직원이 끌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병실로 돌아갈 때까지 명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라산 5.16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별말이 없었다. 울지도 않았다. “에효....” 하고 한숨을 쉬었다. 서귀포 할아버지를 보고 온 날이면 엄마는 이모와 통화를 했다. 어떤 요구르트를 어떻게 얼마나 먹었는지,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또 “에효....” 하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은 이모가 전화 왔다. 할아버지가 오늘은 뭘 먹었는지 이야기하고, 아기처럼 자기가 하는 말을 따라 했다고 자랑했다. 자기는 알아보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 엄마는 다음날 또 한라산을 넘었다.


요양원에서 몇 달을 보낸 할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엄마도 조용히 울었다. 나는 우는 엄마를 보며 나의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상상을 잠깐 했다. 엄마 아빠를 보내는 일은 너무나 먼 미래 같다. 138억년전 우주에서 일어난 빅뱅처럼 아득한 사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미국의 총기난사 사건을 티브이로 보는 것처럼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 같기도 하다.


먼 미래의 엄마 아빠의 장례식에서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어떤 감정을 느낄까?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 봐도 예상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상상력에 도움을 주는 것은, 외할아버지와 아빠는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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