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아이를 낳기 전, 한 번의 유산을 경험했다. 7주 차 심장소리도 듣지 못하고 보냈던 그 아기. 유산이라는 것이 나에게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남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심장소리를 들으러 갔던 그날, 의사분의 표정에서 이상함이 느껴졌던 그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던 그날이었다.
그리고 유산을 겪고 나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나의 엄마도 나를 낳기 전에 뱃속에서 아이를 떠나보냈다는 그 말을 고모로부터 들었다.
<너희 엄마랑 똑같은 걸 겪었네 너희 엄마도 너 가지기 전에 유산했었는데... 6개월이었대, 아들이었고>
돌아가신 엄마에게 직접 듣지 못해 알지 못했던 말을 나는 고모로부터 들었다. 6개월이라니,,, 6개월에 유산이 되었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7주 차에 유산을 겪었던 내 아픔과 엄마의 아픔이 고스란히 만나는 느낌이었다.
<고모 이유는?>
<그건 나도 몰라, 6개월에 잘못되었다고 하더라>
<그럼 성별도 나왔었겠다>
<응 아들이라고 했었던 것 같아>
내가 태어나기 전, 아들이 한 명 있었고 그 아이는 임신 6개월 차에 유산이 되었다. 유산... 초기 유산도 너무나도 힘든데 중기 유산을 겪었던 엄마. 20대 나이에 얼마나 죽은 아기를 진통을 겪으면서 낳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세상 빛 한번 보지도 못하고 태어나지 못한 아기는 얼마나 슬프고 억울할까 싶다.
그리고 나를 가지고 어떤 두려움으로 10개월을 보냈을까, 나는 초기 유산을 겪고 지금의 아이를 가졌을 때 태어나는 순간까지도 불안했다. 뱃속에서 아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가득 채웠기에, 그래서 이 아이를 낳고 내 품에 안았을 때 <드디어 지켰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불쑥불쑥 올라오는 죽음의 공포들 <갑자기 내 아기가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마음은 지금도 불쑥불쑥 나를 찾아온다. 이제는 피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내 마음에서 이런 감정이 드는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엄마의 그 아기도, 그리고 나의 그 아기도 주수는 달랐지만 이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간 아기들의 마음과 동시에 엄마의 힘들었던 마음까지 공존한다. 아픈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공존한다. 누군가에게는 출산까지 수월한 임신이 왜 누군가는 한번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고 만나야 하는 것인지 아픔과 억울함이 같이 공존한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그때 나의 아픔과,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가 겪었던 엄마의 마음까지 전부 느껴져서 마음이 많이 아프다.
사람들은 흔한 일이라고, 더 건강한 아이가 오려하는 거라고 위로하려는 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내 마음과 뱃속에 잠시라도 머물러있던 그 아이의 자리들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흔할 수 있지만 흔하다는 이유로 슬퍼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아 할 그런 것은 아니다. 오로지 슬픔만 느끼는 그 시간들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