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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수 Dec 21. 2023

엄마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는 세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했다. 감각적 쾌락을 목표로 하는 쾌락적인 삶, 명예를 얻거나 어떤 일에서 뛰어남을 인정받는 정치적인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이 바로 관조하는 삶이다. 관조(theoria)는 그리스 말로 '데오리아'라고 하는데, 영어 이론(theory)의 어원이다. 


관조하는 삶, 즉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삶이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인 이유는 이렇다. 육체적 감각을 만족시키려는 쾌락적인 삶은 일시적이다. 심지어 그 만족감이 사라지면 허탈하기까지 한다. 또 명예를 추구하는 삶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의존해 늘 속박된 상태이므로 자유롭지 못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속적이지 않으므로 불완전하다. 반면 관조하는 삶은 다른 사람에 의존해 속박되어 있지 않고, 일시적이 아닌 지속적인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으로 본다.



오늘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눈이 멈췄다. 나는 친정엄마와 성향이 많이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자라면서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다. 가난했는데 더 최악인 것은 시골에 있는 아빠의 형제자매와 할머니의 생활비까지 아버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막내 삼촌이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돌아가셨다. 엄마가 시집왔을 때 시집 살림은 이랬다. 엄마가 처음으로 인사를 하러 갔는데, 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시어머니의 품에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이러한 집안 사정을 전혀 듣지 못하고 시집을 왔다. 지금으로 따지면 '사기결혼' 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런 말조차도 없는 시대였을 것이다. 그냥 모든 사정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돈을 벌고 있는 아버지의 수입을 시골의 시집 식구들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 부분까지는 엄마한테 무한한 연민을 느꼈다. '얼마나 삶이 퍽퍽했을까?' 그 당시 어머니들이 하는 말 중에 '내가 자서전을 쓰면 몇 백 권을 쓸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런 고달픈 삶에서 엄마는 자식들한테 의연한 방패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결혼 후 엄마는 아이 다섯를 낳았다. 많이 낳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아들을 낳을 때까지 힘닿는 데까지 낳으려는 의도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다섯 번째에 아들에 대한 소망을 이루어졌다. 그러니 엄마의 아들에 대한 지극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가난하고 퍽퍽한 삶은 딸들한테 고스란히 전달됐다. 딸들은 가난했고 방치됐고 귀하게 대접받지 못했다. 새삼스럽게 서러웠던 유년시절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냥 엄마가 '나를 고아원에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매일 반찬이라고 하면 김치밖에 없었던 우리 집에는 삼촌들이 성인이 된 후부터는 객식구로 같이 살게 되었다. 남동생이 지금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도 엄마는 삼촌들 때문이라고 속상해하신다. 18평 작은 연립에서 그나마 방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남동생은 삼촌들이 번갈아가면서 우리 집에 살게 되자, 자기 방을 삼촌들과 같이 쓰게 되었다. 그런데 최악은 그 삼촌들이 방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으로 남동생은 지금 흡연자가 되었다고 엄마는 생각하신다. 물론 그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다. 과연 삼촌, 자신들의 아이 방이었으면 '거기서 담배를 피웠을까?' 라는 생각은 든다.


좁아터진 집에서 삼촌들과 같이 살았으니, 그 당시 지금 나보다 더 젊었던 엄마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런 불편함으로 인한 것인지? 엄마는 낮동안에 집에 없었다. 처음에는 동네 '마실(동네 사람 집에 놀러 가는 것)을 가 계셨다. 동네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종일 수다를 떨고 있다가, 저녁밥을 지을 때가 되면 동네 아줌마들과 시장에 가서 저녁거리 몇 개를 사 와서 밥을 지으셨다. 그게 엄마의 하루 일과였다.


낮동안의 엄마의 부재는 아이들.. 특히 딸들한테는 힘든 것이었다. 삼촌들이 없으면 모를까 삼촌들이 낮에 집에 있으면, 삼촌들의 잦은 심부름을 딸들이 해야만 했다. 삼촌들의 점심밥도 딸들이 차려야만 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어른이 아이들을 시키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엄마의 행동 중에 나는 제일 이해 안 가는 것이 었었다. 엄마는 매일 돈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엄마는 낮동안 매일 노는 것 같은데 돈을 벌러 다니지 않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지금 딸들은 모두 열심히 돈을 벌러 다닌다. 남편이 돈이 없다고 하면, '당연히 내가 나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건 유년시절의 엄마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의문에서 시작한 생각인 것 같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니까, 낮동안의 엄마의 행동반경이 넓어졌다. 동네를 벗어나 봉사활동을 하러 다닌 것이다. 엄마의 봉사활동은 그 당시 '새마을 부녀회'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어떤 봉사활동을 했는지 나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겨울에는 '김장봉사'를 다녔다. 봉사활동은 부녀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매일 돈이 없다고 하면서, 돈이 안 되는 일로만 다니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 벌러 안 다니면 학교 끝나고 오는 아이들을 살뜰히 챙기기라도 했으면 이해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제활동 없는 엄마의 친목도모로 인한 낮동안의 부재는 엄마를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행복은 집에 없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읽다가 엄마의 행복을 생각해 봤다. 엄마는 퍽퍽한 자신의 삶으로부터 다른 행복을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 봉사활동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받는 삶, '명예를 얻거나 어떤 일에서 뛰어남을 인정받는 정치적인 삶'에서 행복을 느낀 것이 아닌지? 나는 오늘 생각해 본다. 


어쨌든 엄마의 그런 양육방식으로 우리 딸들은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자랐다. 그리고 웬만한 시련에는 견딜 수 있는 근육을 탑재했다. 엄마는 가끔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지금 잘 사는 것은' 엄마 덕이라고!' 엄마가 독립적으로 키워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딸들은 그냥 웃는다. '엄마의 마음은 엄마의 마음이니까!' 세상을 돌고 돌았더니, 그래도 '멀리 가지 않고 엄마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엄마는 어김없이 집에 계셨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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