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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이어쓰기 May 09. 2024

아카시아 변주곡

1

너는 봄의 아카시아를 닮았었다. 보드랍고 포근한 향기를 가진 예쁜 아이. 그게 바로 너였다. 


아카시아 꽃 향기가 바람을 물들이는 거리를 손잡고 걸으며 너는 행복하다며 웃었다. 수줍게 머금은 너의 빛나는 미소를 보니 괜시리 눈물이 나왔다.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계속 흔들리며 짙어지다가 결국엔 끝이 나버렸다.


아카시아 꽃 향기가 흐드러진 거리에서 너는 이렇게 말했다.


“언니, 우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카시아 향으로 가득했던 내 첫사랑. 지금도 봄만 되면 그 애 생각이 난다. 10년이 지난 이제는 좀 잊어버릴 때도 됐는데 아카시아 향이 어지간히 진해야지. 오랜만에 감상에 빠져 이런 저런 생각을 했네. 그런데 순간, 누군가와 부딪혀 에어팟 한 쪽을 떨어뜨렸다. 사과를 하며 자연스레 에어팟을 주우려는데 이 손, 뭔가 익숙하다.


2

아닐거야. 생각하며 에어팟을 주워 상대방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빠르게 사과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와 부딪쳐 에어팟 한 쪽을 떨어뜨렸다. 몇 걸음이나 왔다고 또.. 죄송합니다.하며 에어팟을 주우려는데 이 손, 뭔가 이상하다. 조금 전에도 봤는데..?


고개를 들어 슬쩍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아이였다. 갑작스런 만남에 당황한 나는 모르는 사람인냥 빠르게 사과하고 자리를 떠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아이는 날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누군가와 부딪쳤다. 에어팟도 한 쪽 떨어뜨렸다. 그리고 또, 익숙한 그 손. 뭐야..? 뒤쪽을 돌아봤다. 길은 하나라 최소한 두 사람은 보여야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혼란한 마음에 잠시 멈춰선 내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그 아이였다. 분명 조금 전 나와 부딪치고 내가 지나온 그 아이가 또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맞네 언니.. 정말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응. 너무 반갑다. 내가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서, 이따 저녁에 다시 만나자. 시간 괜찮아? 그래. 번호 안 바꿨지? 알겠어. 이따가 연락할게 언니


3

그녀는 정말 바람같이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 세 번으로 연속으로 맡은 아카시야 향이 코끝을 찌르다 못해 머리 속까지 둥둥 울렸다. 


계속 빠지는 에어팟을 멍한 채 주머니에 넣었다. 노래로 채워졌던 귓가의 자리는 너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노이즈캔슬링 모드라도 작동되고 있는 듯, 너의 목소리 말고는 온 세상이 조용했다. 


그러고 보면 너는 언제나 그랬다. 나에게는 첫 번째인 너가, 너에게 나는 항상 무언가의 뒤였다. 오늘은 단짝 친구가 애인과 헤어져서, 오늘은 좋아하는 연예인이 근처에서 공연을 해서, 오늘은 새로운 취미가 생겨서, 결국 더 이상 날 만날 시간이 없다며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떠났다. 


봄철 잠깐 폈다가는 긴 여운을 남기고 가는 아카시아같이 우리의 짧고도 긴 연애는 그렇게 끝났다. 


...


회사에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줄곧 멍때렸고,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대리 오늘 왜 이렇게 넋 놓고 있어?”에 대응할 말을 찾아야만 했다. 


할 일은 산더미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몸이 안좋아..”를 핑계 삼아 칼퇴를 했다. 칼퇴를 할 때도 이렇게 굽신거려야 한다니.. 아무래도 난 하루종일 ‘이따 연락한다’던 그 애의 연락을 기다렸나보다. 당연한 것처럼 연락은 오질 않고, 내가 아침에 겪은 일이 사실 꿈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머리를 비워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딪힌 건 의도된 행동이 아닐까.. 그 애가 그렇게까지 덜렁이는 아니였는데. 그러고도 반복되는 생각.. 


칼퇴의 여파로 붐비는 지하철 속에서 속 시끄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어폰을 꼈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간신히 지하철에 올라타 내 자리를 확보한 그때 뒤에서 누가 팍 덮치듯 밀치는 게 느껴졌다. 


4.

인파에 떠밀려 나를 밀치는 몸짓에서 또 아카시아 향이 났다. 설마 하며 돌아보니 하루안에 일어나는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일종의 기적처럼 그 아이가 있었다.

- 이번역은 잠실, 잠실 입니다. 출입문 열립니다.

그 아이는 넘어지기 직전 나를 간신히 잡으며 중심을 되찾았다.

"언니! 어떻게 이렇게 또 보지?"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앗, 나 내려야하는데 언니 내가 집에가서 연락할게."

라고 말하며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다시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고 자리를 잡기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 중 또 누군가 나를 밀쳤다. 


아카시아 향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 이번역은 잠실, 잠실 입니다. 출입문 열립니다.

"언니!! 우와 여기서 또 보네, 아 나 내려야겠다! 연락할게!"

또 그녀가 인파와 함께 휩쓸려 내렸다. 여전히 잠실이였다.


또 사람이 밀려타고 문이 닫힐 무렵, 누군가의 밀침보다 코가 더 빨리 반응했다. 돌아보니 또 그 아이가 나를 짚으며 다시 중심을 찾고있었다.

- 이번역은 잠실, 잠실 입니다. 출입문 열립니다.

"언니!"

커진 눈으로 무어라 말하려는 그애를 따라 잠실역에서 내렸다.


함께 잠실역에서 내린 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며, 그애가 물었다.

"언니, 집 이사했어? 이쪽 아니잖아."

"너 이상한거 못느꼈어? 시간이 반복되고있잖아."


그 아이는 맥락없는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미간을 지푸리던 습관 그대로 미간을 지푸렸다.

"무슨말이야?"

"아까 에어팟 떨어뜨렸을때도 그렇고, 지금도 시간이 세번 반복되었다구."


그 애는 여전히 어려둥절한 표정이였다. 그애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언니, 어디 아파?"

나는 그애의 손을 떼어냈다. 되려 화끈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진짜 미쳐버린건 아닐까, 무슨 이런 말도안되는 일을 믿고 있는지 본인 스스로 부끄러워 말을 돌렸다.

"아, 아니다 내가 뭔가 착각했다. 나 갈게."

다시 뒤를 돈 순간, 또 그녀가 서있었고 손을 뻗어왔다. 

"언니 혹시 열있어?"

또 반복이였다. 두려움에 다시 뒷걸음치며 뒤로 돈 순간 또 그아이가 내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고, 나도 모르게 그 애의 손을 철썩 쳐내버렸다. 


"아야, 뭐야, 언니 왜이래?"

놀라 동그랗게 된 그아이의 표정. 또 손을 철썩 내려치는 장면이 세번 더 반복되었다.


처음 부딪혔을떄, 

지하철에서 부딪히고, 

내 이마에 손을 올리고, 

손등을 찰싹 내려친 순간.

이 아이와 닿을때마다 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에 우리가 헤어져도 꼭 서로 3번의 기회는 주자, 서로 잡을 수 있게. 어때?'

어느 연인이나 할법한 뻔한 우리의 약속이 생각났다.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손을 내밀어 그 애의 손을 잡았다. 용기란 용기를 다 끌어모아 말했다.

"나, 나는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아이의 표정이 굳어갔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맥락없는 소리 싫어하는거 알잖아."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치고는 뒤로 돌았다. 

차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눈물을 떨어뜨리기위해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순간, 난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우리가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 너가 바쁜편이고 내가 부분에 대해서 이해를 너무 못해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 부분에서 내가 많이 부족했다는걸 깨닫고 그 지점을 개선한다면 우리 관계가 조금더 나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혹시 내가 이런 부분을 개선한다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쏱아지는 나의 말에 그애 얼굴은 벙찐 표정이 되었다. 아까같은 짜증은 없었다. 다행히도.


"아, 언니. 그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아이는 음, 하며 한참 말을 고르다 말을 이어나갔다.

" 근데, 미안해. 난 아니야. 그... 다시 연락하긴 좀 힘들겠다."

그 애가 돌아섰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 내 손은 자연스럽게 그 애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이야기했다.

"만나서 너무 반가웠어. 음, 나는 아주 잘 지내고있어. 너도  잘지내지? 가끔 연락이나 하고 살자."

그 애는 씩 웃었다.

"쌩뚱 맞네, 변하질않았어. 내가 조만간 연락할게."

이게 최선이였다. 3번의 기회에서 온 베스트가 겨우 이거구나. 


그 애는 손을 흔들며, 뒤로 돌았다. 아카시아 향이 희미해졌고, 다시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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