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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이어쓰기 May 14. 2024

위대한 고양이 J

1

다들 알다시피 난 위대한 고양이다.

내 집에서 여자 집사와 둘이 살고 있는데, 인간들 말로 아파트라고 해. 꽤 높은 곳에 있어서 낮에는 새가 보이고, 밤엔 수많은 반딧불이 보여.

여자 집사는 처음엔 좀 어설펐는데 어디서 집사 교육을 받고 오는지 점점 나한테 잘했어. 시간이 갈수록 이 생활이 마음에 들었어. 당연한거지. 내가 최고니까.

거의 모든 게 괜찮았어. 딱 두가지. 이 몸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 그리고 가끔 오는 남자 인간만 빼고.


그러던 어느날 이 남자도 내 집에서 함께 살게 됐어. 진짜 문제는 이 남자가 개를 한 놈 데려왔다는 거야. 내 집에 올때마다 풍기던 그 냄새, 그 놈이었어.


이제 맘에 안드는 건 세 가지야. 

내 이름, 저 남자, 저 개놈.

아니, 저런 냄새나고 더러운 털뭉치랑 어떻게 같이 지내란 말이야?



2

따스한 아침 햇살이 포근한 소파에 닿자 스르륵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온기 가득한 나의 집, 잠들기 딱 좋은 고요한.. 


“멍! 멍멍!”


아니, 또 저 개놈이 말썽이네. 내가 제대로 휴식을 취하려 하면 이렇게 와서 난장을 핀다. 털을 한껏 세우고 냥냥 펀치를 날려봐도 소용이 없다. 반응을 해주니 오히려 더 신나하는 것 같다.


여자 집사에게 가서 “저 개놈 때문에 너무 짜증이 나. 우리 예전의 평화롭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라고 툴툴대보았다. 그치만 돌아오는 건 부드럽게 웃는 얼굴과 쓰담쓰담 뿐.


여자 집사 무릎에 앉아 골골대며 곰곰히 생각해봤다. 이 모든 원흉은 저 남자 때문이잖아. 그러니 나는 오늘부터 저 남자가 나갈 때까지 전쟁을 선포한다. 물론 계획은 완벽하게 준비되어있다. 


첫 번째 계획, 접근 금지


그래, 내가 처음엔 호기심에 조심조심 다가가서 발 냄새도 맡고 꼬리도 쑥 올리며 환영의 야옹야옹도 해줬는데 말야. 니가 저 털뭉치랑 집에서 안 나가니 이제는 도저히 안되겠어. 앗, 지금 온다. 가까이 오기만 해봐라.


응? 근데 간식을 가져온다고? 내가 그렇게 쉬운 고양이가 아니란 말이야. 

하악-하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니 남자가 놀라서 살짝 뒤로 물러간다. 그래, 이래야지.


앗, 갑자기 눈 앞에서 자꾸 낚싯대가 왔다갔다 거리잖아. 히잉 이건 못 참아. 요리로 펄쩍, 저리로 펄쩍!

한참을 신나게 사냥 놀이를 하다 보니 츄르가 눈 앞에 있네. 허겁지겁 먹어본… 먹어본다?


눈 앞을 보니 웃으면서 츄르를 들고 있는 남자. 

에잇, 첫 번째 작전은 실패다. 괜찮아. 다음 계획이 있으니까.



3

두번째 작전은 공포작전!

나의 무서움을 알려 줄 때가 된것이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고양이인지 저 어리석은 남자와 털뭉치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먼저 우렁찬 하악질과 냥냥 펀치! 회심의 펀치펀치! 

나의 펀치에 결국 남자의 손등엔 빨간 피가 맺혔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 나의 무서움을 알게되었으니 어서 꺼지라구!

의기양양하게 캣타워에 앉아 있는 멋진 나의 모습.

어라라? 여자집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번쩍 안아올리더니 무릎사이에 꽉끼고는 내 소중한 발톱을! 나의 무시무시한 무기를 또각또각 잘라버렸다. 안돼! 

나의 냥냥 펀치는 힘을 잃고 말았다.


여기까지 가진 않으려했지만, 세번째 작전은 꾀병작전! 

아주 조금 치사해서 고양이 품위에 어울리나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긴급한상황엔 어쩔수없지.


일. 털뭉치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다.

이. 주변에 인간이 없는 것을 확인한다.

삼. 아주 크게 비명을 지른다!


놀란 여자집사와 남자가 달려왔고, 나는 살짝 다리를 절뚝거리며 구석으로 걷는 퍼포먼스까지 완벽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중요한건 이 작전의 반복! 


후후, 이 작전이 먹힌건지 남자와 여자 집사 사이에서는 뭔가 큰 소리가 오가거나 냉랭한 분위기가 흐르는 횟수가 늘어났다. 이런식이라면, 곧 내 작전이 성공할 날도 머지 않았겠어.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도 벌어졌다. 

여자집사가 운다. 자꾸. 자주. 나에게 미안하다고도 하고.

어라? 이건 아닌데...



4

우는 집사에겐 내 고롱고롱 소리만큼 좋은 특효가 없다. 괜히 엉덩이를 더 찰싹 붙이고 고롱고롱 소리를 내보는데, 어째 집사는 날 쓰다듬을 뿐 눈물을 멈출 생각이 없나보다. 


집사는 어쩌다 내가 털을 내뿜을 때 저렇게 울면서 에치에치 소리를 내기도 하던데, 혹시 또 그 병에 걸린건 아닐까? 

괜히 마음이 쪼그라져서 한발자국 물러나 집사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집안에 털뭉치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흠, 그래도 녀석 심심할 때 관찰하기는 흥미로웠는데 말야. 이건 비밀이지만 털뭉치 녀석이 깊이 잠들어있을땐 배에 머리를 기대고 잠자기도 좋았다. 제법 푹신하고 뜨뜻한게 낮잠에 참 좋은 베개였는데 말야. 물론 꾹꾹이를 시도했던건 진짜진짜 비밀이다. 털뭉치놈이 깜짝 놀라서 짖어대는 통에 그만 관두긴했지만. 


남자도 털뭉치와 세트였을까. 어느날부터 남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옆에 있으면 사냥 놀잇감으로 쓰긴 딱이었는데. 집사보다 츄르도 많이 줬었다고. 원래 없었으면 모르겠지만 있다 없으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집사에게 가서 물어보고싶은데, 집사는 영 나와 대화하고 싶은 기분은 아닌가보다. 


.... 


근데 괜찮아.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새로운 이방인들이 오면 집사의 기분은 곧 풀렸었다. 다음 번에 오는 이방인과 털뭉치에게는 조금은 상냥해져 봐야지. 


오늘도 지는 석양에 난 참 마음이 넓은 고양이라는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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