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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이어쓰기 May 30. 2024

Time is running out

1

지구에 남은 시간은 이제 200일 남짓이다. 정확히는 208일. 

몇 년전 처음으로 발표되었던 소행성과의 충돌은 ‘사실이다, 거짓이다’의 정치판 놀음을 거쳐 일 년이 채 남지 않아서야 사실임을 인정하였고, 인정 됨과 동시에 국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만 엄포를 놓았다. 


사실 지구가 언제 멸망하든, 혹은 그 전에 내가 죽든 그건 나에게 큰 이슈가 아니다. 

다만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행하는 모든 범죄들과 이를 총과 칼로 다스리는 정부가 조금 시끄러울 뿐이다. 될 수 있으면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될 수 있으면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으며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은게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내 소원이다. 


다니던 회사에는 어느날부터인가 나가지 않게 되었다. 1년 정도 먹고 살만한 돈은 가지고 있었고, 사실 그 돈이 없다고 해도 이미 사람들은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도시 속에서 생필품은 훔쳐야 내것이 되는 것이었고, 있으나 마나 한 깡패 정부에서는 밀에 겨를 섞어 한 사람당 한 되씩 나눠주는게 전부였으니까.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였지만 조금 검소하고 부지런하게 산 덕분에 집에는 먹을 것과 의약품이 남아있었고, 이래저래 버티면 살만 하겠다 싶었다. 


통신은 되는 날도, 안되는 날도 있었다. 정부가 회유하고 싶을 때는 풀어줬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막아버렸기 때문에 되는 날과 안되는 날은 추측하기 어려웠다. 다만 되는 날은 엄마가 가끔 전화해서 울곤 했고, (아, 계엄령으로 인해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모든 건 잘 되야- 라는 뻔한 위로를 하는 게 전부였다. 


쾅쾅쾅 - 

어느 날 누군가가 내 집 문을 두드렸다. 

빌라 중에서도 5층, 즉 엘리베이터 없는 5층에 모르는 사람이 방문할리는 없는데. 

그 덕에 그동안 조용히 살 수 있었는데, 누구일까. 



2

현관문에 달린 조그만 렌즈에 눈을 대고 살며시 문 밖의 동태를 살폈다. 문 앞을 서성거리는 익숙한 얼굴. 집주인 아주머니였다. 


쾅쾅쾅 - 

- 아가씨, 안에 있어요?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문은 열지 않은 채로 작게 대답했다. 

- 네.. 무슨 일이세요?


주인 아주머니는 세입자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돼서 순찰을 나오신 거라고 했다. 세상이 이러니 혹시나 나쁜 마음을 먹고 일을 벌이지는 않을지 우려하신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밀린 월세며 관리비를 전부 받아낼 거라며 너스레를 떨고는 되돌아 가셨다. (쾅쾅쾅 -) 아니, 옆집으로 가셨다.


며칠 뒤, 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

- …계세요오…


이번에는 주인 아주머니가 아니었다. 저번처럼 현관문에 달린 조그만 렌즈에 눈을 대고 바깥을 살폈다. 이번에도 익숙한 얼굴. 바깥 활동을 자주 하던 시절 오며가며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 옆집 여자였다. 내 또래 정도 되는 여자였는데 따로 인사나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왠일이지?


- 네, 누구세요

알지만 괜히 물었다.

- 와.. 정말 계셨구나. 옆집이에요. 얼마전에 주인 아주머니 왔다 가셨을 때 소리를 들었어요. 너무 조용해서 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와.. 정말 반가워요.. 저는 진희라고 해요.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진희는 문은 열어주지 않아도 좋으니 가끔 와서 이야기를 해도 되겠는지 허락을 구하고는 조용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가끔 온다던 그녀는 다음 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내 집 앞에 찾아왔다. 회사 다닐 적에 들었던 각종 사랑과 전쟁 이야기, 3년간 짝사랑했던 남자를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이야기(근데 와이프와 아이가 있는), 사돈의 팔촌이 키웠던 강아지 이야기까지 끝없이 풀어내는 진희는 조용한 첫인상과 달리 꽤 대단한 수다쟁이였다. 가끔 통신이 되는 날에도 연락올 곳이 없었다던 진희는 정말로 혼자서 견디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되도록 혼자 있고 싶었던 나지만 매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진희를 어느새 기다리게 되었다. 내 유일한 취미생활인 종이접기 책상을 현관 앞으로 옮기고, 진희의 이야기를 라디오 사연 삼아 들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서너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부터 진희가 찾아오지 않았다. 길어도 이틀을 넘기지 않고 찾아오던 그녀가 벌써 열흘동안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건지, 어디가 아픈 건지. 바로 옆집이니까 살짝 갔다와볼까? 간단히 채비를 한 나는 정말 오랜만에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3

혹시 만약에 정말 혹시라도 진희씨가 죽어있다면 어쩌지?

생각만으로도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도 제대로 마주한 저 없는 사람의 죽음이 나에게 이렇게나 큰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점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진실을 알고싶지 않은 마음에 문을 열지 못하고 누가 쫒아오기라도 하는 듯 다시 돌아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죽었으면? 나는 어쩌지? 그녀의 죽음을 상상하면서도 실상 걱정하는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징그러웠지만 이게 나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죽었다고 한들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면 조금 더 나을까? 막연하게 기다리면서 남은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 그건 어떤 삶인거지?


새삼 스스로의 꼴이 웃겼다. 마지막까지 아무와도 엮이고 싶지 않았던, 혼자가 좋다고 말해왔던 나와 진희씨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과 보이는 모습은 크게 별다르지 않을텐데 이런 지옥이 될 수 있다니.

내가 사람을 멀리 했던 이유를 혼자가 좋다고 말해왔던 이유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에 고팠구나 깨닫자 다시 문 밖으로 나설수있었다. 


진희씨의 집앞에서 쿵쿵 노크를했다. 인기척은 없었다.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인기척은 없었다.

혹시 몰라 현관문 손잡이를 돌려보니 문은 열려있었다. 침실에 진희씨가 누워있었다. 빨갛게 된 얼굴로 색색 거리며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열이 심한듯 했다. 

"진희씨?"

다가가서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열이 심했다. 내 해열제가 얼마나 남았더라? 머리는 나도 모르게 또 계산을 하고 있었다. 



4

온갖 생각이 스쳤지만 일단 해열제를 가져오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가려고 문을 여는데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문 앞에.. 누군가 서있다! 황급히 다시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커다란 발이 쑥 들어왔다. 


“너 누구야! 발 치워”

“넌 누군데”

“필요한 게 있다면 나눠줄게.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건 아니잖아”

“아니, 누군데 우리 누나 집에 있는 거냐고”


누나? 진희씨 동생인 건가. 그래도 그 말 한 마디에 바로 문을 열어주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이름을 대봐”

“황진희”


그 말을 들은 순간 손에 잔뜩 들어가있던 힘이 스르륵 풀렸다. 문이 열리자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된 남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래서 넌 대체 누구냐고. 우리 누나는 어디있고!”


화가 나서 한껏 흥분한 상대를 안심시키며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나는 진희씨의 이웃이고,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그리고 지금 진희씨가 많이 아픈 상태라고.


그 역시 한동안 진희씨가 연락이 되지 않아 찾아왔다고 했다. 오는 길은 무척이나 험난했다고 한다. 계엄령이 내려 지하철도, 버스도 움직이지 않으니 50km가 넘는 길을 걸어와야 했고, 강도를 만나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뺏겨야 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먼 길까지 누나를 찾아온 이유는, 그녀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준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후, 얼른 집에서 해열제를 가져온 뒤 진희씨에게 먹였다. 물수건도 적셔 탈탈 턴 뒤 이마에 얹어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모든 행위가 큰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지구에 남은 시간은 이제 60일 남짓인데.


“저기, 남은 시간에 뭘 하고 싶어요?”

“누나를 찾아왔잖아요. 제가 아끼는 사람이랑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게 제 소원이에요. 최후의 날엔 누나 옆에 누워 어렸을 때 얘기를 잔뜩 하며 행복하게 잠들 거예요.”


내가 맞게 될 최후의 날을 상상해보았다. 집에서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심심하면 종이접기를 하다 평소처럼 잠이 들겠지. 그렇게 죽게 될 텐데… 이대로 괜찮을까? 될 수 있으면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으며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희씨의 방문으로 인해 나는 오랜만에 누군가와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진희씨가 아파 아무도 날 찾지 않게 되니 너무나도 큰 공허함이 찾아왔다. 그래서 (바로 옆집이지만) 밖으로까지 나오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 곰곰이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다 시선 끝에 기타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치지 않아 방구석에 쳐박혀서 먼지가 잔뜩 쌓인 기타. 대학교 때, 형편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결국 ‘내 기타’를 마련했을 때의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친구들과 매일 합주를 하며 한 곡, 한 곡을 완성했을 때의 기쁨도. 아마 그때가 내가 가장 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커버 위 먼지를 툭툭 털고 기타를 꺼내보았다. 지판도 쓱쓱 매만져주고, 정성껏 조율도 해주었다. 그리고 악보를 꺼내 가장 처음 친구들과 합주했던 곡을 연주해봤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리프가 쉬운 곡이기도 하고, 가장 열심히 연습했던 곡이었기에 몇시간 정도 연습하니 제법 잘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기타를 치니 손끝이 따끔따끔 쓰라렸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같이 연습하던 친구들은 지금 뭘 하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자주 연락하고 만나던 친구도 있지만, 작은 오해로 멀어져 아예 연락하지 않게 된 친구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미친 척 하며 연락해봐도 좋지 않을까?


마음을 굳게 먹고 같이 합주를 했던 친구들 모두에게 연락을 돌려보았다. 

“우리,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온라인에서 공연을 하면 어때? 예전처럼 말야”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의 반응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세상이 망해가는 이 시기에 무슨 소리냐고 욕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두 명은 재밌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명은 베이스, 한 명은 드러머였다. 드러머 친구는 지금 집에 드럼이 없는데 냄비와 컵을 모아 두드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이 말도 안되는 제안을 수락해준 친구들에게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아무도 없다면 나 혼자라도 공연을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욱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며칠 지나자 회복한 진희씨와 동생이 찾아왔다. 내 계획을 듣더니 자기가 예전에 좋아했던 남자의 이상형이 피아노 치는 여성이었다며, 그래서 본인도 피아노를 배웠었다고 공연에 끼워달라고 했다. 동생은 자기가 한때 결혼식 축가로 여럿 여성을 반하게 했다며 보컬에 지원했다. 정말 그 누나에 그 동생이구나.


그렇게 우리는 제법 밴드의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나, 진희씨, 동생은 매일 한 곳에 모여 연습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은 온라인으로 합을 맞춰봤다. 그렇게 세상의 끝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 망하기 하루 전, 리허설을 준비하며 라이브를 켰다. 그런데.. 대기 접속자 364명? 눈을 의심했다. 우리 엄마와 몇몇 지인들에게 홍보하긴 했지만 이 정도 사람들이 들어올 리는 없을 텐데. 진희씨가 호들갑 떨며 우리의 공연이 트위터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세상이 망해가는 시기에 밴드 공연을 한다며. 우리의 시도가 조용히 마지막 날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도파민이 된 것 같다고.


떨리는 손으로 기타 넥을 잡았다. 정말 잘해내고 싶지만 망해도 괜찮다. 왜냐면 내일 모레면 이 세상은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후회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연주해보자.


On-AIR.


“음,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마지막 날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나요? 아마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분도 있고, 그저 담담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겠죠. 많이 괴로워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저는, 저희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재연해보고 싶었어요.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요. 음… 거두절미하고 첫 곡 들려드릴게요. 그리고 만약에라도 우리 모두가 살게 된다면, 다음 주 이 시간에 또 뵙도록 하죠.”


방 안에 엠프가 왕왕왕 울리고 Muse의 ‘Time is running out’ 선율이 울려퍼졌다. 댓글 창엔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텍스트가 가득 채워졌다. 세션 모두가 집중해서 하나의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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