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잣에 담긴 온기
천운영의 산문 「진정」을 읽다 보니 ‘꼬숩고 다디단 햇잣죽’이라는 따스한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햇잣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경기도 가평의 홍 선생이 문득 떠오른다. 몇 해 전, 내가 한 모임에서 사무총장 일을 오래 맡아하던 때였다. 특별한 도움을 드린 것도 없는데, 홍 선생이 느닷없이 귀한 햇잣을 사 보내주었다. 고생 많이 한다는 말 한마디에 담긴 마음은 지금도 아련히 남아 있다.
홍 선생은 어느 그룹의 재단에서 오랫동안 사무총장으로 일해 온 분이다. 나 역시 작은 규모의 모임이긴 해도 같은 이름의 직책을 맡고 있었기에, 그 점이 그의 마음을 조금 더 기울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직책의 무게는 크고 작음을 떠나 늘 비슷한 결을 지닌다. 그 결을 알아보는 이들 사이에는 말 없는 연대 같은 것이 조용히 흐른다. 그가 건넨 잣 봉지에는 그런 연대와 따뜻함이 배어 있었을까?
잣은 예로부터 귀하게 여겨졌다. 고려와 조선 시절엔 왕실과 사찰의 중요한 식재료였고, 오늘날에도 경기도 가평은 잣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다. 작고 하얀 알맹이 안에는 고소한 기름과 맑은 햇살이 오롯이 집약되어 있다. 몸을 따스하게 하고 기력을 북돋워준다는 옛사람들의 믿음처럼, 보양을 위해 잣죽을 찾는 풍경은 오늘에도 이어진다. 작은 잣 한 알에 깃든 정성은 단순한 곡식 이상의 마음이었다.
천운영의 산문에서 그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잣죽을 ‘손맛이 살아 있는 위로’라고 썼다. 잣을 곱게 갈고, 국물을 저으며, 불 앞에 잠시 머무는 동안 삶의 온기가 천천히 스며든다. 결국 음식의 이야기를 빌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마음을 말하는 글이다. 고소한 맛보다 정성을 담은 손길과 그 손길을 오래 기억하는 마음이 더 깊게 남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마음이 가평에서 내게도 전해졌다. 홍 선생은 오랜 세월 재단 사무총장 일을 해낸 뒤, 지금은 일을 내려놓고 쉼을 즐긴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점잖은 분이지만, 속에는 늘 따뜻하고 단단한 품위가 있었다. 그 따뜻함은 어쩌면 집안의 기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1970년대에 홍 선생의 장인어른과 한 직장에서 함께한 적이 있다. 풍기는 외모처럼 참 인자하셨던 분이다. 그 품성을 고스란히 닮아, 홍 선생의 부인 이 여사 역시 주변에서 좋기로 소문난 분이다. 그 집안에는 보기 드문 은근함과 사람의 향기가 잔잔하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보내온 잣 봉지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수고한다며 건넨 작은 정성 한 조각, 세월이 흐르고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마음 하나가 거기 담겨 있다. 햇잣의 고소한 향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은근히 남는 마음. 그 햇잣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 사이의 온기는 결국 이렇게 소박한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