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 속 한 사람
아저씨가 언제부터 우리 맨션에 있었던가?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경비 직원은 여러 맨션을 관리하는 회사에서 파견되어 근무하는 분들이라고 했다. 언제나 이 맨션에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파견회사에서 내보내는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어도 무리가 없는. 누가 와도 같은 매뉴얼대로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우리 맨션의 경비원은 누구이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시뽀가 태어나면서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밤이면 밤마다 잠들 기색이 없는 시뽀. 자동차 카시트에 태우거나 아기띠에 넣어 온 동네를 빙글빙글 돌아야지만 잠드는 시뽀! 그런 시뽀를 재우거나 달래기 위해 핫서방은 시뽀를 품어 안고 날마다 맨션을 돌아다녔다.
어르신들로 가득한 맨션에 아기냄새 폴폴 풍기는 작은 생명체 등장.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 트러블 메이커로 알려진 까다로운 이웃들마저 시뽀 앞에서는 세상 순한 천사가 되었다. 맨션 사람들이 '익명의 이웃'이 아닌 '정다운 이웃'이 된 것, 마주치면 긴 수다를 떨 사람이 하나씩 늘어 가는 것은 시뽀의 탄생과 핫서방의 붙임성 덕분이었다.
핫서방이 경비 아저씨와 친해진 것도 그때부터라고 했다. 시뽀를 안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경비 아저씨를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났다. 짧은 인사는 긴 안부로, 긴 안부는 서로의 근황으로, 근황 나눔은 속 깊은 이야기와 고민으로.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고 속내를 터놓으며 보폭을 좁혀 나갔다.
핫서방을 통해 알게 된 우리 맨션 경비 아저씨는 이런 사람이다.
아저씨는 60대 남성. 일본에서는 상당한 명문이라 할 수 있는 나고야대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입시학원을 운영했다. 젊은 시절 결혼을 했고, 슬하에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부족함 없는 삶을 아저씨는 살았다.
그러다 고비가 찾아왔다. 아저씨의 어머니가 앓아누운 것이다. 들어놓은 보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거듭되는 수술과 입원 치료비, 간병에 들어가는 비용은 가족의 저축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큰 차도가 없더라도 병원비를 대는 것이 자식 된 도리였다. 10년을 넘어간 간병에 아저씨는 학원을 처분했다.
이 사건으로 아내는 떠났다.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수십 년간 더 이어질지도 모를 상황이 밑빠진 독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아들이 장성해서 독립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앞가림 잘하는 아들은 자기 인생을 살러 갔다. 아저씨는 혼자가 되었고 직업이 없어졌다. 다른 학원에 취업해 강사를 하자니 학원을 운영하는 측에서 부담스러워했다. 젊은 강사를 고용하는 쪽이 더 편해서였다.
아저씨는 경비원이 되었다. 나고야대 출신의 경비원. '나고야대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나 '나고야대 출신의 기업가' 혹은 '정치인' 등은 들어봤어도 경비원은 처음이었다. 쉽게 조합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를 아저씨는 받아들였다. 그는 인근 맨션에 살며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 아저씨는 경비 일도 책임 있게 했다.
다 좋은데, 일을 너무 책임 있게 해서 큰일이었다. 아저씨가 떠맡은 또 다른 일. 그것은 우리와 같은 층에 사는 할머니(욧카이치 돈테키 집 딸과는 다른 분이다. 이 할머니는 만주에서 태어나 20살 때 처음 일본에 왔다고 한다.)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일이다. 모친 간병으로 파산한 사람이 독거 할머니 간병을 돕고 나선 것이다. 아... 이 아저씨를 어쩌면 좋나.
그 할머니가 혼자 사시기는 하지만 아주 혼자인 것은 아니다. 1층에 남동생 부부가 살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어째서 생판 남인 경비 아저씨가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는가? 소식을 들은 나는 "그게 정말 사실이냐"고 핫서방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다.
사연을 들어 보니 남동생 부부와 할머니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혈연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엘리베이터 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교류가 없는 상황. 할머니 입장에서는 세상 천지에 혼자 남은 것보다 더 외로울 것이 분명했다. 그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본 아저씨는 정해진 업무 외의 일을 자처했다. "어쩔 수 없잖아." 하는 너털웃음과 함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또 간병이라니. 아저씨가 안쓰러웠지만 "추가 근무 수당도 못 받는 일을 왜 하세요? 퇴근 후의 시간은 아저씨를 위해서 쓰셔야지요."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저씨가 아니면 누가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간단 말인가? "앞으로 병원은 제가 모시고 다녀올게요." 하며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이웃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남처럼 살아가는 이유는 개인주의 때문이 아니라, 혈연으로 이루어진 내 가족 말고는 다 '남'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중심주의 때문입니다. 이웃을 나와 동등한 개인으로서 배려하고 보호하는 것이 개인주의입니다." 따위의 글을 쓰며 젠체하던 나는 결정적인 순간, 할머니의 병원 통원은 못 본 체했다.
내가 귀찮아질만한 일 앞에서는 황급히 대문을 걸어잠그고 '현대사회의 익명의 이웃' 을 자처했다. 꾸물꾸물 불편한 마음이 올라올 때면 "나는 외국인이고 일본 병원은 잘 몰라서", "우리는 옆집 할머니를 돌봐드리고 있으니까" 하는 변명을 끌어다 붙이기도 했다.
그것이 나와 아저씨의 됨됨이 차이였다.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신세지는 것을 꺼리는 이 문화권에서, 할머니가 아저씨에게 소정의 사례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례를 하고 말고를 떠나 '얽힐 것인가 얽히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 앞에 아저씨는 한 발을 들였고 나는 한 발을 뺐다.
그러면서도 '이웃을 돕지 않는 요즘 세상'에 대한 이야기나, '외국인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대하는 일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힐난했다. 나는 마치 그런 적이 없는 것처럼.
맨션 주민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누구에게든 웃으며 다가가는 아저씨를 어떤 사람들은 싫어했다. "경비원이면 경비원답게 관리 일만 하면 되지 왜 주민과 친분을 맺습니까?" 하는 안건이 반상회에 올라온 것이다.
"옛날에는 집안 일을 봐주는 아랫사람과 집주인이 함부로 말도 안 섞었습니다. 경비원 일을 하러 옵니까, 놀러 옵니까? 예의를 아는 다른 경비원으로 바꿔 달라고 합시다." 하는 이야기였다. 아저씨는 파견 회사의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사람이니, 유니폼을 입는 그 순간 '유니폼 입은 사람 답게' 행동해야 한다나.
어이 털린 안건에 나의 모국어가 용수철처럼 삐용~ 하고 튀어나오고 말았다.
"뭐래?"
뭐래? 그래서 뭐 어쩌라고. 경비원이며 유니폼이 뭐 어쨌다고. 정말 '어쩌라고'라는 말 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것이 웬 파워하라(갑질)인가. 경비 아저씨가 경비 업무를 한다고 해서 그가 아랫사람인가? 경비원은 입력된 일만 수행하는 기계 같은 존재여야 하나? 주민과 경비원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친밀하게 지내는 게 맨션의 유지와 존속에 해가 되나? 예의란 아저씨가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보여야 하는 태도인가?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고, 곤란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탈인 아저씨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특정한 직업을 가진 이를 하대하거나 멋대로 자신을 높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매뉴얼을 수행하는 부품처럼 일하기를 요구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고, 나의 얼빠진 '뭐래'와 '어쩌라고'를 보다 논리정연하게 풀어냈으며, 아저씨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지 않았다.
그 일로부터도 몇 년이 지났다. 시뽀는 아기띠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크게 자랐고, 아저씨와 핫서방 두 중년은 날마다 '누구 배가 더 나왔나', '누구 머리숱이 더 많은가' 같은 것을 두고 배틀을 벌이고 있다. 겉치레로 하는 허울 좋은 말이나 격식을 벗어난 허물없는 사이. 두 사람은 꼭 놀이터에서 만나 친구가 된 아이들 같다.
그런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관조적인 나와는 사뭇 다른 아저씨를 보면 '요즘 시대는(혹은 일본 사람은) 다른 사람 일에 무관심하고, 보고도 못 본 척한다'라는 문장이 언제 어디서나 모두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 어디서든 이렇게 살 사람은 이렇게 산다.
더불어, 아이 양육이 사회의 공동 과제인 것처럼 간병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이 더 확고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랬더라면 아저씨가 저축을 까먹고 생계수단마저 처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핫서방과 나는 아저씨를 영영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갔을 테지만, 아저씨의 삶은 지금과는 크게 달랐으리라. 타고난 역량대로 살며 아내와 함께 노후를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간병 파산이며 간병 살인 같은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으면 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흘러 흘러 이웃이 된 그. 있는 듯 없는 듯 모두 같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던 경비원이 더 이상 '대체 가능한 그림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일하는 실루엣이 아닌, 삶의 굴곡과 가치관과 성격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아저씨. 아저씨의 생김새와 습관과 웃음소리와 표정과 말씨와 행동을 알아가며 그림자 속 한 사람을 발견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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