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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기 시작한 지 1년 9개월이 되도록 초고가 없다니

이런 책은 처음 써봐서

by 최민지





때때로 예전 일기를 뒤적인다.


꾹꾹 눌러 쓰인 활자 속에는 펄떡이는 계절을 온몸으로 마주한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참 이상하게도 초여름을 지날 때면 2년 전의 일기 하나만이 떠오른다.

"앞으로 써 보고 싶은 소재가 있냐" 하는 출판사 대표님의 물음에 킷사텐이라는 단어를 던진 지 반년 정도 지난 때의 일기다.






제목 : 나는야 망망대해에서 조개 파는 인간

날짜 : 2023년 5월 1일


오늘은 막막한 기분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쓰기로 한 두 편의 샘플 원고를 쓰고 있는데 매우 막막하다. 이것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조개 잡는 자의 기분! ㅋㅋㅋㅋㅋ 얼마 전에 조개 잡았다고 비유가 또 이렇게 되네.


지난번에 쓴 목차로 말할 것 같으면, 목차라는 것은 정말 정말 넓디넓은 모래밭에서 조개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몇 군데 찍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갯벌에서 조개를 파보니까 걔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더라고. 없는 데는 없고, 있는데만 있는 생물이 조개였다.

바로 그런 것처럼 목차는 "어 이거 이야기 좀 되겠는데? 조개 알맹이 좀 있는데?" 하는 것을 지도 위에 대략적인 동그라미로 그려 놓은 것이다.


그 목차에 맞게 글을 쓰려면 조개가 많-이 모여 있는 그 장소에 가서 집중적으로 땅을 파서 알맹이를 얻어야 한다. 어떤 조개가 있는지,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그걸로 국을 끓이든지 구워 먹든지 하는 거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조개가 있다' 하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곳에 있는 조개를 다 알지는 못하는 상황. 조개가 없는데 가공 조개향 시즈닝만으로 맛을 내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


놀라운 것은 "와 이쯤 되면 진짜 많이 팠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눈앞에서 "야! 여기 나도 있어!" 하면서 새로운 조개가 막 뻘을 비집고 올라온다는 거다 ㅋㅋㅋㅋ

"어 야 너도 있었냐? 와... 내가 너를 몰랐으면 어쩔 뻔했냐..!" 하는 그런 조개 알맹이들이 자꾸자꾸 나타난다.


예를 들면, 내가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카페 파울리스타가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 발간을 논의한 장소였다고 한다. <창조>는 파울리스타에서 커피시럽을 마시며 구상한 것이라고.

최근에 정말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왜 몰랐지. 어떻게 아직도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지.


이 책은 정말이지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다. 내가 대단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웬만한 한량 놈팡이가 아니면 이 조개밭을 팔 수 없어! ㅋㅋㅋ 한량계의 1위 놈팡이인 오직 나만이 이러고 앉아있을 수 있다. 부지런하신 분, 바쁘신 분, 똑똑한 분은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어요.


최한량은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파낸 것이 가장 많은 두 곳을 선정해 원고를 쓰기로 하였다.

한 편 겨우 썼고 이제 다음 편을 쓰려는데, 조개가 있다 해도 어려운 것이 이 조개들을 다 늘어놓으면 무슨 조개 백과사전이 될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스파게티 면 사이에 조갯살이 콕콕 박혀 입맛을 돋우는 수준으로 딱딱 들어가 줘야 되는 건데 내가 너무 내 조개 컬렉션을 쭉 나열하고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읽는 사람이 조개껍데기에 깔리겠어 ㅠㅠ 영 재미가 없다.

이 조개를 어떻게 강약중강약으로 딱딱 배치를 할까. 어떻게 하면 조개가 더 맛깔나게 살아날까.


있는 조개도 잘 다루지를 못하겠고, 아직 깊이 손을 못 댄 다른 조개밭은 언제 파볼지도 모르겠다.

근데 막 밀물이 차올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약속한 날이 다가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이고 참. 난리도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하나의 소재로 탄생할 수 있는 책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킷사텐도 마찬가지다.

[킷사텐 가이드북ㅣ도쿄에서 꼭 가야 할 킷사텐 100선] 같은 기획도 가능하겠고, [일본 킷사텐 커피 레시피] 같은 책도 있을 수 있겠다. 킷사텐에서 느끼는 감정을 모아 엮은 [킷사텐 감성 에세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기로 한 [문화와 예술이 태어난 살롱으로서의 킷사텐]이라는 소재는 인문서에 가까웠기에 개인의 감상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는 쓰일 수 없었다. 알아야 할 것은 끝도 없이 많았고, 많이 알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킷사텐에 얽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을 나는 '망망대해에서 조개를 파는 기분'이라고 느낀 듯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망망대해가 확실하다. 이 일기를 쓰고 나서도 1년이 지나도록 초고조차 없었으니까.






모든 꼭지의 초고를 간신히 써낸 것은 킷사텐 책 작업을 시작한 지 1년 9개월이 지난 후였다. 가공 조개향 시즈닝으로 맛을 내지 않고, 오래 공들여 얻은 실한 조개만을 선별해 영양가가 높은 원고였다.


그럼에도 <도쿄 킷사텐 여행>만이 특별한 책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조개를 잡는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선배 책의 존재가 내 고개를 숙이게 했기 때문이다.


근대 한-일 다다이스트의 교류를 담은 책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는 자료조사 기간에만 20년이 걸렸다고 했다.

저자인 요시카와 나기 선생님은 동료들과의 10년에 걸친 번역 작업 끝에 지난해 <토지>를 한국어로 완역해 낸 분이기도 하다. <토지> 전권이 외국어로 번역된 사례는 이번 일본어판이 세계 최초라고.


<오스기 사카에 자서전>, <세이토>, <쓰키지 소극장의 탄생>과 같은 서적도 마찬가지다. 출판시장에서 상품으로써 많이 팔리고 팔리지 않고를 떠나서, '책'으로서의 의미와 가치에 충실하고 또 충실한 책들이었다.






망망대해에서 조개를 파던 시간 동안 마주한 제목 하나하나를 떠올리면, 나에게 있어서 책은 많이 내는 것도 빨리 내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채 익지 않은 풋사과에 붉은 칠을 해 세상에 내어놓기보다는, 그 사과가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정직하게 정성을 다할 것. 챗GPT로는 닿을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줄 것. 내 관심사와 세상의 관심사가 만나게 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나 자신에게 더욱 가까워질 것.


나에게 중요한 건 이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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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존 레넌부터 하루키까지 예술가들의 문화 살롱

<도쿄 킷사텐 여행>을 펴냈습니다

우리의 도쿄 여행을 넓고 깊고 향기롭게 만들어주는 책이 되길 바라며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73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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