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건축가를 보고 흔히 '잘한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만들어내는 건축물이나 계획이 짜임새가 있고 미적으로 완성도가 높을 때, 그리고 남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건축가들이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되어 잘하는 사람(건축가)들이 너무 많아졌다는 이야기도 자주 한다.
그런데 이 '잘한다'의 기준, 실력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지표 내지는 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능 시험을 보았는데 몇 점이 나왔냐, 혹은 야구 선수가 작년 타율은 얼마고 홈런은 몇 개 쳤고 방어율은 얼마고.. 하는 식으로 숫자로 나타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건축가의 실력에 대한 지표는 어느 정도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은 어떤 건축가가 하는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을 보면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 건축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있고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몇 개의 작업들을 보고 아주 순간적으로 파악하기 힘들 수는 있지만, 찬찬히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면 거의 확실하게 파악이 가능하다. 이렇게 좀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글 초반에 말했던 '잘하는' 수준의 사람이 많다고 해도, 거기서 또다시 스펙트럼이 나뉘게 된다. 정말 진지하게 파고들어서 잘 하는 사람과 그럭 저럭 잘하는 사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거나 그냥 별로인 사람.. 이런 식의 구분이 가능해진다. 하고 있는 방식에 따라 스타일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수준차이는 분명히 있다고 볼 수 있다. 장르는 힙합, 댄스, 락, 발라드..로 나뉠 수 있지만, 각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성적표 마냥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지표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건축가라면 '정성적'으로 느껴지는 잘함의 정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금' 잘하고 못하고도 물론 중요하다. 사람들, 대중의 눈에 보이는 수준은 그것으로 결정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다. 지금 좀 못하더라도, 앞으로 계속 성장해간다면 괜찮다. 언젠가 괜찮은 걸 만들 수 있고, 훌륭한 걸 만들 수 있고, 대단할 걸 만들 수 있으니까. 건축가는 소위 데뷔하는 시기라는 것이 늦기도 하고, 루이스 칸처럼 50~60대에 유명해지는 케이스도 많기 때문에 인생을 길게 보고 접근해간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게임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그냥 방구석에서 계속 나만의 계획안을 그리면서, 또는 설계공모를 하면서, 언젠가 찾아올 건축주를 기다리면서 성장을 기대할 것인가. 결국 건축가는 자기 건축물을 만들면서,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면서 성장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궁국적으로 세상에 '건축물'로서 나라는 존재를 알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나라는 성장 곡선이 끝난 상황이고, 개발도상국 시절처럼 프로젝트가 넘쳐나는 시기가 아니다. 특히 최근에는 극심한 불황으로 생존 자체가 어렵다는 건축가들이 태반이다. 어찌보면 이런 상황에서 '실력'이나 '성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한가해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리고, 쓰고,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남기고,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누구에겐가 보여줘야 한다. 비록 그것이 지금은 공허해보일지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지층이 되면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미약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스케치를 남기는 것도 그런 이유가 가장 크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것'을 쌓아나가야만 AI가 설계하게 될 미래에 무엇인가를 내세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쌓이면 결국 실제 '건축물'로 말할 수 있는 기회도 반드시 올 것이다.
내가 두려운 것은 지금의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 보다 (물론 부족한 것도 맞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정체되고 있거나 심지어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 또는 두려움이다. 실제로 정체되어 보이는 듯한 건축가들도 보인다. 예전에 만든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인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40이 넘다 보니 나보다 건축을 늦게 시작한 후배들이 나보다 앞서나가는 듯한 모습도 자주 보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조금은 한탄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아주 작은 한 발, 한 발 이라도 나아간다면 언젠가 그래도 꽤 '괜찮은(훌륭한은 좀 힘들 수 있을 것 같다)' 건축가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본다.
최근 가수 조용필의 공연을 보았다. 50년생,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 3시간 가까운 공연을 게스트도 없이, 멘트도 거의 없이 풀 라이브로 이끌어가는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 나이에 그 목소리를 유지하실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의 대답은 한결같고 심플하다. 그저 '연습'이다. 그 정도의 위치, 그 정도 나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음악을 듣고, 연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서 끝없이 연습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론가 '유시민'을 좋아한다. 최근 격변의 시기에 그의 말과 글에서 많은 위로와 식견을 얻을 수 있었다. 작가로서, 평론가로서 적지 않은 나이의 그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대중과 교감하면서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역시 지속적인 노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투브, 뉴스, 인터넷 등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지금의 트렌드가 무엇인지 기민하게 반응하고 호흡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유연하게 바꿔왔기 때문에 지금껏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김종성 건축가님의 전시를 보았다. 힐튼 호텔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도 물론 감탄스러웠지만, 90이 넘으신 나이에도 강연을 하시면서 후배들, 대중들과 교감하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고 경험이 쌓이고 사람들의 존경,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생각과 행동, 노력이 뒤따라야 지나온 세월에 따르는 아우라가 생기는 것이다.
오늘의 이 짧은 글도 내가 성장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