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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정 Aug 12. 2020

일러스트레이터의 하루

자기소개

 

영어회화 학원에서 일을 한지 벌써 7개월이 되어 간다. 주어진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의 생각, 취미, 관심사, 강점, 약점, 가치관들을 되뇌게 된다. 이제는 딱히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각 질문에 기계 같은 대답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소개를 하는 것이다. 오늘의 나에 대한 관찰이 내일은 틀린 기록이 될까 봐서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겁이 많아진다는 뜻이라는데,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을 쏟는 중.

돈과 시간을 쓰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누군가 그랬다.

2020년 6월의 초여름을 보내고 있는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

/

 요즘은 오전 10시쯤 눈이 떠지면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지난 2주 정도 오후에 일어나는 생활을 청산하려 노력 중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자러 가는 시간에 잠이 드는 것이 아직도 쉽지가 않다. ‘아침형 인간’에 대한 집착을 놓는다면 편해질 수 있을까? 주섬주섬 침대에서 몸을 끌고 나와 가방에서 어제 그린 그림 몇 장을 꺼낸다. 스캐너에 그림을 한 장씩 올려두고 스캔을 한다. 600 dpi (dots per inch) 정도로 스캔을 하는데 이게 참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다. 1초 만에 한 장을 스캔할 수 있다면 1200 dpi로 설정했을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그렇게 이것저것 하며 12시를 맞이하면 엄마와 동생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설거지는 보통 동생과 나눠서 하는데, 그 날 저녁 내가 집에 없을 것 같다면 점심은 내가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끝내면 부엌 불과 선풍기를 끄고 나와 내 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작업실에 가져갈 아이패드, 충전기, 줄 이어폰, 지하철에서 요즘 읽는 책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그리고 샤프까지 가방에 순서 없이 막 담는다. 겨울에 산 백팩을 메기엔 너무 더워 최근에는 한쪽 어깨에 메는 천가방만을 사용하는 중이다. 그렇게 짐을 챙기면 엄마랑 동생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우산을 챙기는 날에는 절대 비가 오지 않지.

 6호선 역에 도착해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으면 내가 탈 열차가 막 역을 떠나버리곤 한다. 이벤트에 당첨되거나, 가위바위보에서 이긴다거나, 사다리 타기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든가, 귀찮게 우산을 챙겨간 날에 일기예보대로 비가 내려준다든가, 이러한 작은 운들은 내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8분 정도의 시간 동안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대신, 1-1부터 8-4까지 왔다 갔다 걷는다. 1.5회 정도 왕복을 하면 열차가 역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럼 걸음을 멈추고 나랑 제일 가까운 곳 아무 데에 서서 열차를 탄다. 내리는 사람을 밀치고 먼저 열차에 들어가는 아저씨를 본다면 열심히 등을 째려봐준다. 작업실이 있는 상수역까지는 쾌적하고 빠른 6호선으로 대충 40분이 걸린다. 만약 작업실이 6호선이 아닌 곳에 위치해 있었다면 나는 진지하게 다른 곳을 고려해봤을 것이다. 이만큼 6호선에 대한 나의 사랑과 신뢰는 깊고 두텁다 못해 충성스럽다. 작업실은 상수역과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오후 2시 이후엔 1번 출구로 나와 걷고, 그 전엔 2번 출구로 나와 걷는다. 오후 2시 전후로 그림자가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단 한 모금의 햇빛도 맞지 않을 테다 하는 나의 굳은 결의다. 보통 작업실에서 먹을 간식을 편의점에 들러 사간다. 하지만 요즘은 카페더블루스의 아이스라테에 꽂혀 간식 대신 커피를 사 간다. 다 마시고 나면 처리해야 하는 테이크아웃 플라스틱 컵과 빨대가 부담스러워 물병을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작업실에 도착하면 사온 라테를 쪽쪽 빨며 멍을 때린다. 어떤 음료든 첫 한 모금이 가장 맛있다. 하물며 물도 그렇다. 더 이상 남은 음료가 없어 얼음만 사그락 대는 아쉬운 소리가 들리면 나는 그제야 종이 몇 장을 꺼내거나 스케치북을 편다.


영감이여 오소서.


‘영감’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몇 달 전과는 달리 핸드폰의 메모장을 켠다. 그곳에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생각, 느낌, 감정, 관찰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 쓰여있다. 엄지 손가락으로 목록을 쓱 훑다 보면 더 깊게 파보고 싶은 노트가 눈에 들어온다. 그걸 가지고 잡다한 낙서를 한다든가, ‘완성된’ 그림을 그리든가,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시간을 보낸다. 목록을 훑는데도 딱히 마음을 울리는 소재가 없으면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목적 없는 글을 쓴다. 아니면 주변에 있는 작은 책방을 간다든가 아예 낮잠을 잔다든가 한다. 내가 할 일을 단순히 ‘그림 그리기’에 국한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번 달부터는 생각을 시각화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무형을 유형으로, 유형을 무형으로.


이렇게 작업실에서 노닥거리다 보면 금세 저녁시간이다. 상수에 사는 친구에게 추천받은 김밥집을 간다. 굳이 비닐봉지와 나무젓가락을 쓰고 싶지 않아 내 가방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에 있어 굉장히 무심한 사람이었는데, 작은 생각과 가치관이 한 사람의 생활 방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점이 여전히 신기하다. 저녁까지 먹으면 더 이상 적을 이야기도 없다. 이전과 똑같이 머리 쓰면서 고민하며 종이를 괴롭힌다. 그러다 번아웃이 되기 직전에 마스크를 챙겨 작업실에서 나온다. 집 가는 방향이 같은 작업실 친구와 함께 상수역으로 향한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또 역에서 걸어 나온다.

잠이 들지 않는 서울의 밤에서 드라이브를 하고 있는 (가상의) 내 모습.

사랑하는 도시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나는 본래 별보다 달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 괜찮다. 가끔 보이는 위성을 대신 우러러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 적적한 밤하늘을 채워주는 가로등과 건물들의 불빛이 오히려 더 낭만적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우주에 쏘아 올린 물체를 내가 지구에서 볼 수 있다니, 참 멋있는 세상이군. 아침에는 전혀 나올 수 없는 감성으로 푹 잠겨 있을 때면 집에 도착한다. 침대에 누워 다시금 잠을 청한다. 무엇이든 21일 동안 지속적으로 하면 습관이 된다던데, 밤에 잠이 드는 습관을 가지려면 아직 7일이나 더 남았다.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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