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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정 Aug 17. 2020

뉴욕을 추억하며

그림일지 (2)

최근 그림을 그릴 사진을 구글 포토에서 찾다가 20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학교를 다닐 적 field trip 으로 뉴욕을 갔었는데, 그 당시 사진들을 하나씩 훑어보니 꽤 재밌었다. 살짝 역설적인 것은 당시에 나는 뉴욕을 즐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국의 겨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추위가 날 맞이했고, 거의 맨날 진눈깨비가 내렸다. 운이 없게 만나는 사람마다 굉장히 불친절했고 길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힘들게 갔던 코니 아일랜드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이 닫아 있었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지도를 보고 이상한 장소에 도착하기도 했고, 학교에서 짜준 일정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것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며 한참을 나름의 추억에 잠겼다는 것이다. 그래, 잘 생각해보면 싫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 앞에서 보는 게 믿기지 않던 마티스와 모네 같은 거장의 그림들. 카페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와 내 친구를 보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You guys are amazing!” 하고 서둘러 나가던 남자. 고개를 아무리 뒤로 젖혀도 시야에 다 안 담기던 높은 마천루들. 교통편 때문에 학교 일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울적한 마음에 들어갔던 카페에서 3시간을 내리 혼자 그림을 그렸던 것. 꽤나 귀엽다고 생각한 뉴욕의 노란 신호등과 택시. 한때 함께 유학을 준비했던 친구들을 만난 것. 더 오래 구경하고 싶었던 빈티지 가게들.
뉴욕에서 그렸던 그림들을 모아보니 그때의 추억들이 하나둘씩 기억이 났다. 그림의 뒷이야기 들을 작게나마 풀어본다.


뉴욕의 노란 택시들.

이 날은 학교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굉장한 설렘을 가지고 전날 잠에 들었는데,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친구들에게는 먼저 출발하라고 이야기했고, 나는 뒤늦게 준비를 허겁지겁 마치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역 개찰구가 고장이 나서 내가 가지고 있던 표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대로 된 표를 사려면 기계를 이용해야 했다. 문제는 표를 사려는 줄이 굉장히 길었다는 것이고, 한참을 기다려 내 차례가 와서 보니 기계에는 현금만 투입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도 어떻게든 돈을 뽑아 보려고 ATM 기계를 찾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화면에는 계속 거절만 떴다. 뭐, 어찌어찌 겨우 돈을 뽑고, 잔돈을 만들려고 쓸데없는 껌도 사고, 다시 역에 돌아와서 보니 기계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고 돼있더라. 그때의 절망감은 지금 생각해도 참... 형용할 수 없다. 이쯤 되니 내가 여기서 더 이상 할 수 있다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역에서 나와 목적지 없이 그냥 시내를 떠돌아다녔다. 한참을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목이 말라 한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시키고 앉아 창문 밖에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구경했다. 런던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뉴욕은 그보다 더 다양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림이라도 그리자는 생각에 스케치북을 꺼내 창문 밖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 어째 그 많은 사람들을 단 한 명도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래도 2년 전 그림이다 보니 미흡한 점이 많이 보여 부끄럽다. 하지만 그림 자체보다도 뒷이야기에 큰 의미를 두며 함께 글에 첨부한다. 다음에 뉴욕에 또 가게 된다면 이 카페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다.


호텔 리셉션에서 줄을 선 사람들.

뉴욕을 떠나는 마지막 날, 호텔 리셉션에서 교수들을 기다리며 그린 그림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서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깜깜했다. 호텔 투숙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우산 하나 없는지 모두 비에 젖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그렸다. 후에 런던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호텔 측에서 메시지가 왔다. 아직도 호텔에서 묵냐고 물어보더니 다음에 올 때 꼭 알려달라고 했다. 다음에 오면 무엇을 해주려고 그랬나 궁금하나 호텔이 흡사 영화 샤이닝에 나오는 호텔과 비슷했기에 다시 찾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바쁜 타임스퀘어.

학교 친구와 함께 “우리가 뉴욕에 왔는데 타임스퀘어를 안 그리면 섭섭하지!” 해서 둘이 쫄랑쫄랑 타임스퀘어로 갔다. 이 날은 St. Patrick’s Day 였고, 거리의 행인들은 모두 초록색 옷을 입고 이 날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타임스퀘어로 가는 길이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굉장히 짧게 느껴졌다. 대충 앉을자리를 보고 털썩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에 우리를 슬쩍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직접 다가와 말도 걸기도 했다. 그림에서는 타임스퀘어가 나름 산뜻해 보이지만, 현실은 굉장히 춥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그림을 마무리할 때쯤에는 손가락이 얼어서 감각이 없더라. 그래도 후회 없는 시간과 결과물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무조건 이름을 짓는데 — 뭔가 ‘진짜’ 마무리를 하는 느낌으로 — 이 그림은 Busy Time Square 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하지만 이 그림도 보면 볼수록 ‘내가 왜 사람을 더 그려 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당시에 사람 그리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그려 넣은 남자 두 명도 잘 보면 참 자신 없는 게 느껴진다. 그에 비해 하늘 높게 솟은 마천루들을 그리는 건 너무 즐거웠다. 그 많은 창문과 간판, 브랜드 로고 그리고 입구를 다 그려 넣으면 내가 마치 건축가가 된 기분이었다. 다음에 타임스퀘어를 또 그리게 된다면 건물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조화롭게 그려보고 싶다.




뉴욕의 빌딩.

여기부턴 최근에 작업한 그림들이다. 찍어온 사진들 중 건물이 들어가 있는 사진들을 골랐다. 요즘 타블로의 The Tablo Podcast 팟캐스트를 듣는데, 이 그림 또한 그 팟캐스트를 들으며 그렸다. 왼쪽이 원래 스케치북 페이지다. 보통 스캔을 하고 나서 요리조리 색깔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데, 검은색 배경에 울퉁불퉁한 하얀 선이 마음에 들어 오른쪽 이미지도 저장했다. 두 그림의 대비가 좋다.


구겐하임 미술관 1층에서 핸드폰만을 바라보고 있는 관람객들.

구겐하임 미술관에 갔을 때, 1층에 사람들이 일렬로 앉아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 게 재미있어 찍었다. 그림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은 왼쪽에서 두 번째 남자가 뻘쭘하게 친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요즘은 꼭 필요한 부분만 그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아니다, ‘연습’이라고 하면 거창하니 그냥 ‘가지고 노는 정도’라고 정정하겠다. 100을 그려도 무얼 나타내려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1을 그렸는데도 100을 전달하는 그림이 있다. 후자가 되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 앞날이 멀기만 하다.

이것도 왼쪽 페이지가 스케치북 원본, 오른쪽은 색깔 수정본.

Grand Central Terminal의 사람들 스케치.

이건 (아직) 어디에도 게시하지 않은 스케치. 뉴욕에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방문했다. 역에 들어서자마자 그 웅장한 크기에 압도당했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당장 계단에 앉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우리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구글 포토를 뒤적이며 발견한 당시의 사진이 그러한 아쉬움을 불러일으켜줬다. 워밍업 정도로 시작한 그림인데, 생각보다 원근법이나 공간감각을 필요로 해서 완성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이 그림 또한 타블로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그렸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의 부분 부분을 볼 때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그렸는지 기억난다. 저 뒤에 계단을 그리고 있을 때는 타블로가 명품 옷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랬지. 그림 그릴 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나의 집중력을 생산적으로 분산시켜주는 게 바로 팟캐스트다.




어제부터 미드 Friends 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 안에서 간간이 나오는 뉴욕의 모습들을 보니 다시 한번 뉴욕에 가보고 싶어 졌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여정에서는 진눈깨비 따위는 내리지 않을 제대로 된 봄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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