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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도은 Jan 24. 2024

볼링장에서 만난 플라시보

‘We are Loud Like Love’ 그들이 사랑을 외치는 방법

https://youtu.be/pi_AJxsdOKo?si=aIyXEEwNKrPiaeqR​​



20대 초반 동아리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어쿠스틱 밴드 동아리였던 우리는 주로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에 다니거나 가끔 공연을 앞두고 합주 연습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혈기 왕성한 체력을 다른 곳에 쓸 길이 없었는지 습관처럼 학교 앞 맥주창고를 아지트 삼아 모였다. 별 일이 없어도 그랬고, 별 일이 있다면 판을 벌여 놓고 술을 마시던 날들이었다.


그날은 어쩐지 학교에서 별로 가깝지도 않은 강남까지 가서 술자리를 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대학생이던 우리는 강남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아놓고도 그중 누군가 야, 강남은 소주가 5천 원이다. 라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소주가 비싸서 그랬을까. 많이 취하지 않았던 날. 우리는 2차 대신 가까운 볼링장에 가기로 했다.


술집에서 조금 걸어서 도착한 그곳의 첫인상은 캄캄했다. 볼링화를 받아 들며 언뜻 보니 안쪽 여기저기에서 불빛도 비치고 있었다. 무슨 볼링장이 이래? 클럽 같네. 볼링화를 신기 위해 허리를 굽히며 생각했다. 스포츠나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취미가 없던 나는 볼링장에 별로 가본 적이 없었다. 아마 대학시절 친구들과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어두운 볼링장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만 보던 공간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낯설었다. 불빛이 반짝이고 사람들의 목소리조차 묻힐 만큼 큰 소리로 음악이 나오는 분위기가.


이런데도 있나 봐. 처음 보는 공간에 들어서 신기한 마음에 두리번거리던 것도 잠시. 가자하니 따라오긴 했으나 여전히 나는 공을 굴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빠르게 굴러가는 볼링공들과 점수판의 바뀌는 숫자들 그리고 볼링을 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친구들과 농담을 섞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귀를 끄는 음악이 농담을 흩트렸다. 이전까지 어떤 음악이 나오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강렬한 도입부였다.


이 음악 뭐지? 볼링에 열중해 있거나 삼삼오오 떠드느라 정신이 없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또 음악을 찾고 있었다. 내부가 시끄러웠으나 그보다 음악 소리가 더 컸기에 휴대폰이 소리를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빨리 휴대폰을 들었다가, 스피커 근처로 길게 뻗어 올린 팔을 다시 내렸다. 휴대폰 액정 속에는 아직은 덜 익숙한 밴드명이 떠있었다.


<Loud Like Love - Placebo>


플라시보다! 이렇게 신나는 곡도 있구나!

나는 머릿속에 느낌표를 띄운 채 눈을 반짝였다.


플라시보의 음악을 그날 처음 만난 건 아니었다.



첫만남은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레스토랑에서였다. <Happy you’re gone>과 같은 비교적 서정적인 곡들을 먼저 들었다. 일하던 곳에서 평소에 나오는 음악들은 주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Back to black>이라던가 <Love is a losing game> 같은 소울 풀한 알앤비나 클래식한 팝송들이었다.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팔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정신없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손님들이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목소리와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늦은 오후에는 종종 플라시보의 사운드가 그 자리를 채웠다. 홀의 대장이라 볼 수 있던 점장님은 브레이크타임에 그들의 음악을 틀어두시곤 했다. 점장님이 좋아하는 밴드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플라시보를 듣는 점장님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가끔 같이 일하던 다른 사람들이 힙합이나 케이팝을 틀기도 했지만 내 마음에 들어온 건 플라시보의 곡들이었다. 다른 곳에서 쉽게 들어보지 못했던 곡이라서 그랬을까. 그 이후로는 살면서 플라시보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음악이 나오는 홀도 꽤 즐거웠다. 하지만 플라시보의 음악이 나오면 아까와는 다른 공간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와인잔을 닦거나 텅 빈 홀을 정리하며 플라시보를 듣는 날들이 잦아졌다. 어떤 날은 점장님이 그들의 곡을 틀어주시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플라시보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나는 그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나이차이가 꽤 나는 큰언니 같던 점장님도 좋아했고, 그래서 볼링장에서 만난 플라시보가 더욱 반가웠다.


밴드명과 동시에 점장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약간은 끈적한 보컬의 음색이 색색의 조명들 사이에 얹혔다. 볼링공이 레일을 가르며 굴러가는 소리와 볼링핀이 쓰러지며 부딪히는 소리들이 드럼을 치는 박자에 리드미컬하게 뒤섞였다. 방금까지 농담을 던질 뿐이던 배경들이 풍경이 되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바뀌고 있었다. 불꽃이 튀는 듯한 화려한 앨범커버조차 지금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어떻게 제목도 <Loud Like Love>이야?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속말을 삼켰다. 반복적으로 들리던 후렴구의 일부였다. 플라시보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예지 하는 듯한 세 단어로 이루어진 곡명이었다.


”얘들아 우리 사진 찍자!“


이 음악을 당장 찾아야겠다는 목표를 이룬 뒤 기분이 좋아진 내가 친구들에게 평소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머리만 맞대면 이유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시절이기도 했다. 나의 한마디에 마치 자석에 이끌린 듯 어깨 양 쪽으로 친구들이 틈이 없이 붙어왔다. 하나, 둘, 셋. 아직은 술기운이 남아있는 채로 셔터를 누르는 순간. 서로 아무런 허물이 없는 사람들처럼 달라붙어 어떤 고민도 없다는 듯 우리는 웃었다. 우리는 사랑처럼 시끄럽다는 가사가 머리를 울리는 와중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은 다시 들춰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리고 이 곡을 들을 때마다 팝업카드를 여는 것처럼 튀어 오르곤 한다. 고작 4분 남짓한 순간이었다. 브라이언 몰코의 목소리가 우리의 청춘과 어둠과 불빛에 함께 뒤섞이던 찰나. 내게는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잊혔을 그때를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찍자고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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