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결혼을 했다. 천 년 만 년, 부모 겨드랑이 밑에서 살 줄 알고 녀석은 결혼에 뜻이 없다고 큰소리치더니, 언젠가는 혼자 남을 것 같아 그래도 옆에서 함께 늙어 갈 누군가 있으면 좋겠다며 생각이 바뀌어 지난 토요일 장가를 갔다. 결혼은 본인들의 선택이지 부모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라서 아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무심한 아들과의 생활은 덤덤했다. 찬란하게 빛 날 일도, 배꼽 빠지게 흥겨울 일도, 뚜껑 열리게 열 뻗히거나 감동할 일도 없이 슴슴한 가을 무 같은 날들이었다.
너무 무심해서 그저 숨 쉬는 전봇대 하나 집 안에 꽂아 놓고 산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길게 문자를 보내도 녀석의 답은 좀처럼 다섯 글자를 넘지 않는다. 성에 차지 않아 다시 보내라고 하면 서너 글자 덤으로 얹어서 다시 보낸다. 서비스로 그 흔한 이모티콘 하나 없는 놈이다.
이역만리 지구 반대편 칠레로 혼자 3주간 여행을 가도 잘 도착했는지 안부 문자는 고사하고 생모의 생사 확인도 하지 않는, 인정머리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놈이다. 짐꾼 하려고 마트에 데리고 가면 "엄마 찬스"라며 비싼 면도기 등 제 물건부터 쓸어 담는 파렴치한 놈이었다.
그저 병뚜껑 딸 때나, 높은 선반의 물건 내릴 때나 써먹고 나면 딱 본전인 놈이 이젠 장가를 가서 그조차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왠지 밑지는 장사 같아 그마저도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이젠 며늘 아이의 병따개용으로 넘겼다.
그런 무심한 녀석의 등 뒤에서 혼자 마음을 추스르며 어쩌면 나도 자식이었을 때 저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어머니도 나처럼 가끔 헛헛해하셨을 텐데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몰랐을 뿐 돌아보면 나도 아들 녀석처럼 덤덤한 딸년이었다.
자식은 잘 키워 액세서리처럼 자랑하라고 낳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되어 그동안 미처 헤아리지 못한 내 부모 심정을 돌아보라고 낳는 것 같다. 이제야 비로소 부모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알고, 또 알겠는데 터무니없이 무심했던 나를 사과하려 해도 그것을 받아줄 부모가 없다.
자식 안에 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무심한 아들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녀석을 보며 나를 돌아보고 나를 보며 내 부모를 헤아려 본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덜 후회했을 텐데 그저 빈 허공에 긴 한숨만 메아리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무심한 아들 녀석의 고소를 취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