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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Dec 02. 2021

흑역사 찍은 날


  교회에서 주일예배 대표기도를 했다. 한 달 전부터 약속된 자리는 부담스러우면서도 특별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 조용히 교회를 다녔는데 대표기도라니. 3년 전 새로운 교회를 찾을 때 바람은 한 가지였다. 말씀을 듣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예배당에는 말씀만이 충만했다. 온라인 심방 때 만난 교구 목사님은 경쾌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대표기도를 제안하셨다. 홀린 듯이 수락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가슴팍에 돌멩이가 콱 박혔다.


 대표기도를 하기에 앞서 평소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넘어서 성도들 앞에 서려고 하니 의식이 되었다. 왠지 대단하게 보이고 싶은 욕심은 기도의 흐름을 헝클어뜨렸다. 처음 교회에 적응할 무렵, 대표 기도자들의 진심 어린 기도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열렸던가. 절로 흠모했던 마음과 달리 기도는 따라할 수 없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 걸까. 대표로 기도할 만큼 자격이 있는 것일까. 기도가 어렵게 느껴졌다.

 

 기도를 준비할 무렵, 나는 출간이라는 뜀틀을 가까스로 넘어가고 있었다. 탈수된 빨래처럼 남은 힘을 탈탈 짜낸 상태. 난생 처음 책을 내면서 기뻤고 설레었고 또 간절했다. 책 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막상 이루어지니 두려움도 같이 피어났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개인의 생각과 감정,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날 꺼내고, 근접한 단어를 찾아내고, 문장에 집중하고, 수시로 퇴고하는 일. 얼마나 흐른 지 모를 시간 동안 욱신거리는 허리, 침침한 눈이 고생스러웠지만 그 일에는 성과나 대가를 바랄 순 없다. 그저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만으로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쓰고 또 쓰면서 맘이 헤어지고 닳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민낯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하나의 글이 파편이라면 책은 나를 형성하고 있는 조각이 떼여 나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입되었다. 전력을 다할수록 환영받지 못할까 봐. 터지지 않는 폭죽이 될까봐.


 책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커질수록 너무나 부끄러웠다. 힘껏 뛰어오른 만큼 웅크리고 싶었다. 이틀 뒤면 첫 출간을 앞두고 있던 그때, 감정의 둑이 무너져 있었다. 감정의 둑이 무너졌다는 말은 누가 툭 건들면 눈물이 쏟아진다는 것. 한번 터진 눈물이 잘 멈춰지지 않는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심정으로 대표기도 자리에 섰다. 전날 밤,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커피를 세 모금 정도 마셨을 뿐인데 난 동이 틀 때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나이가 몇인데 괜찮을 거라고, 청심환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체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라고 달래가면서.


 나의 믿음과는 다르게 대표기도 순서가 다가올수록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찬양시간에 “오직 주만이 나의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가 흘러나왔다. 울컥했다. 가사와 다르게 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드디어 강단에 서서 기도의 첫 줄을 고백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이 픽 터졌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내 귀에 너무나 크게 들려서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최대한 담담하게 읽고 싶었던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콧물이 나서 훌쩍거리고, 목소리는 바이브레이션으로 넘나들었다. 망했다.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예배는 멈출 수 없다.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주님의 산성에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랬다. 마음의 둑이 무너진 상태. 두려움과 염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나는 처음 서보는 발판이 위태로웠다. 나를 감추고 보호해줄 투명갑옷은 어디에도 없었다. 살림하면서 조용히 살면 몰랐을 감정이었을 텐데 대표로 서는 것이, 책을 내는 것이 정당한 거냐고, 등단한 작가도 아닌 교회의 직분자도 아닌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내가 욕심을 낸 건 아니냐고 끊임없이 물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부르셨다. 당신이 보여주는 세상을 따라오라고 하셨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내게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크게 자빠져! 실패해야 배울 수 있어. 실패해야 살 수 있어.” 나는 그 부분을 몇 번이고 재생하며 돌려보았다. 수시로 자빠지고 넘어지는 건 내 특기 아니던가. 나의 소원을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은 “아무렴 어때. 내가 널 기뻐하는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정확하게 정면을 응시하렴. 그곳에서 배울 것이고, 그 가운데에 내가 함께해”라고 용기를 보낸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에 베개를 잘못 누워서 목이 삐끗하다는 아들을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려 있었다.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 많이 떨었어.” 아이는 담담하게 말한다. “엄마, 우린 시간 맞춰서 다 보았어. 엄마 기도할 때 동생도 눈물이 줄줄 나게 울었어. 나는 팻말 만들어서 힘내라고 계속 응원했어.” 겨우 참았던 눈물이 또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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