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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S Oct 11. 2021

벨 에포크의 환상, 겔랑 뢰르 블루

Guerlain "L'Heure Bleue", 1912



벨 에포크의 환상, 겔랑 뢰르 블루


Guerlain "L'Heure Bleue", 1912

Parfumeur: Jacques Guerlain
Notes: Iris, Heliotrope, Violet, Aniseed, Carnation, Vanilla, Sandalwood, Musk





« L'Heure Bleue » de Guerlain ©


랑의 "Jicky(1889, Aime Guerlain)" 이후 첫 번째 고전적 대작인 "L'Heure Bleue"는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리기 2년 전인 1912년에 출시되었다. 뢰르 블루는 '푸른 시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해가 지고 은하수가 밤하늘을 수놓기 직전의 고요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흔히 회자되는 자크 겔랑의 3대 작품인 뢰르 블루(L'Heure Bleue, 1912), 미츠코(Mitsouko, 1918), 샬리마(Shalimar, 1925) 중 첫 번째 작품이며,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낭만적인 유럽을 품고 있던 향수다(자크 겔랑의 아프레 롱데가 1906년작이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일반적으로 위 세 작품을 꼽는다). 조르조 슈발리에(Georges Chevalier)가 디자인한 뢰르 블루의 바틀은 오히려 비 바틀(Bee Bottle)보다 더욱 유명하고, 겔랑의 상징이 되었다. 미츠코 역시 같은 바틀이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출시된 "라 쁘띠 로브 느와"가 같은 디자인을 차용하고 있다. 


뢰르 블루는 자크 겔랑 바로 그 자신의 작품인 아프레 롱데(Apres l'Ondee, 1906)와 코티의 로리간(L'Origan, 1905)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세계대전 이전의 낭만을 대변한다. 특유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 품고 있는 고전적인 화려함은 틀림없이 현 시대의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향수와도 다르다. 


한편,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미츠코와는 명확히 대척점에 있는 향수다. 이들 두 향수는 그런 점에서 자주 비교된다. 미츠코가 품고 있는 미스테리한 음울함이 뢰르 블루의 미스테리한 평온함과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뢰르 블루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시적인 로맨틱" 정도 되겠다.




« L'Heure Bleue » Ad, 1994


기타 다른 오래된 향수들처럼, 뢰르 블루 역시 수많은 리포뮬레이션 즉, 재조향을 거쳐왔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2005년 즈음의 IFRA 규제로 인한 리포뮬레이션으로서, 그 이전에 생산된 뢰르 블루가 이전의 향기를 보다 닮았다고 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빈티지'라 불리우는 80/90년대의 뢰르 블루마저도 그 이전의 60년대와는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2000년대 이전에도 여러 번의 리포뮬레이션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70년대의 뢰르 블루와 60년대의 뢰르 블루 역시 다르다. 고전 향수들은 오랜 기간 명맥을 이어왔다 하더라도 항상 같은 포뮬러로 제조된 것이 아니기에, 리포뮬되었던 시기를 알아야 함은 물론이고, 어떤 시기의 향수를 리뷰의 대상으로 할 것인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 이것이 빈티지 향수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난점이다.


뢰르 블루는 2018년 현재에도 판매되고 있다.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이해가 전무후무하게 뛰어나다고 하지만, 우리는 1940년대에 그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의 녹음은 스테레오 시대 이전의 것으로서, 매우 단조롭게 들린다. 그의 해석을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음악을 감상하는 데는 그렇게 적합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 지금의 시점에 콘서트홀에서 연주되는 베토벤이 더 의미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자유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뢰르 블루에 대한 해외 블로거들의 평점이 떨어지고 있지만 가장 의미있는 뢰르 블루는 지금 판매되고 있는 버전일지도 모른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가면 빈티지 뢰르 블루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대척점에 있는 느낌의 시적인 대조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였다고 하는 빈티지 뢰르 블루가 아니더라도, 현재의 뢰르 블루가 그 빈티지 버전을 가장 닮은 향수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조심스레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미 찾아볼 수 없게 된 오래된 역사 속의 향기에는 일종의 '환상'이 따르기 쉽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L'Heure Bleue » Ad, 1920


뢰르 블루는 그 오프닝부터 자신의 성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누가 보더라도 겔랑의 향기이며, 보기 드물게 파우더리한 고전적인 향취다. 태어난 지 107년째를 맞이한 향수 답다. 평온한 대자연의 어둑한 푸르름을 초연히 관망하는 듯한 뉘앙스의 이 향수는 낭만의 시대,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화려함을 담은 한 편의 시와 같다. 


뢰르 블루를 품고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것이 어색하다. 모던한 인테리어와 의상, 말쑥하고 정제된 향기, 이 모든 것이 가득한 현대의 어느 곳에서나 뢰르 블루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뢰르 블루의 시간은, 다름아닌 자크 겔랑의 두 눈에 푸르름이 가득 담겼던 1900년대 초반의 그 시간인 것이다. 영화 '타이타닉'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 그 배경, 그 시대를 떠올려 보면 될 것 같다. 


자크 겔랑은 그 시대의 화려한 낭만을 아이리스의 섬세한 안개와 헬리오트로프의 환상, 바이올렛의 분내음을 통해 향수 속에 담았다. 향수의 구성은 고전 중의 고전답게 매우 클래식한 층위로 되어 있으며,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핵심적으로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뢰르 블루는 차갑고, 복합적이며, 고전적이다.



L: « L'Heure Bleue », Darcy , R: « L'Heure Bleue » Ad, 1960



전형적인 허브와 시트러스 노트로 시작하는 탑 노트는 형형색색의 플로럴 향기와 미스트처럼 뿌려지는 분내음 위에 사뿐히 올려져 청량감을 더해준다. 클라리 세이지와 타라곤, 아니스, 시트러스 노트 등의 조합은 고전적 시프레와 푸제르의 탑 노트로 많이 사용되는 것인데, 이런 탑 노트가 매우 복잡하게 구성된 미들 노트와 결부되어 보랏빛 꽃들의 답답함을 해소해줌과 동시에, 허브기운이 도는 다소 인위적인 화사함이 고전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특히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베르가못이다. 살랑이는 바람처럼 다가오는 베르가못은 뢰르 블루의 도입부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미들 노트까지 매끄럽게 연결시킨다. 일순간 겔랑의 샬리마가 스쳐지나가는데, 바닐라 톤의 묵직하고 짙은 향기 위에 마법처럼 얹어져 있던 바로 그 시트러스 노트다.


청량하면서도 스파이시한 탑 노트가 지나고 나면 뭉근 바닐라와 까칠한 카네이션의 대조가 깔아둔 융단 위에서 본격적인 아이리스와 헬리오트로프, 바이올렛의 3중주가 시작된다. 아이리스는 세르주 루텐의 아이리스 실버 미스트(Iris Silver Mist, 1994)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이 신비스럽고 희뿌연 안개처럼 퍼져나가며, 바이올렛의 고전적인 분내음은 우아하고 정적이다. 오묘한 달콤함을 지닌 헬리오트로프는 해질녘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번져내려오는 검푸른 물감과 같다. 마치 미츠코(Mitsouko, 1918)에서 슬며시 엿보였던 것과 꼭 같은 일랑일랑과 클로브의 쏘는 듯한 향취도 느껴진다.

베이스로 내려가면서 공기 중에 넓게 퍼져나가는 듯했던 파우더리한 향취는 보다 포근하게 내려앉으면서 약간의 머스크 그리고 샌달우드의 안정감있는 잔향 위에 곱게 덧입혀진다. 통카빈-샌달우드-오크모스-바닐라라는 전형적이고 정석적인 베이스노트는 다소 뭉근 듯하다.




청량감이 감도는 화사한 오프닝과 복잡미묘하게 꾸며진 화려한 미들 노트, 고전적인 베이스노트로 정리되는 뢰르 블루는 그야말로 '벨 에포크의 향수'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뢰르 블루가 무언가 '웨어러블한 향수'로 다가갈 여지는 아예 없다. 매우 특별한 날, 매우 특별한 옷을 입고, 매우 특별한 컨셉으로 뿌릴 수 있을 만한 향이지만, 뢰르 블루가 품고 있는 시적인 아름다움과, 지나가버린 그림같은 시대에 대한 동경, 환상적인 고전적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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