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향수의 계열과 추천 향수들
향수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다름아닌 향수의 '계열'이다. 향수에 대한 설명을 보다 보면 '플로럴 계열' 또는 '프루티 계열' 등의 단어를 발견하게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 단어로부터 직관적으로 의미가 와닿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는 향수에 관하여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향기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향수의 계열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향수의 분류는 향을 만들 때 필요하기도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어떤 향수를 좋아하는지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향수를 구입하고자 할 때 찾고 있는 범주에 어떤 향수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향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알아볼 때에도 필수적이고, 반대로 내가 어떤 향수들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유사한 향수들을 찾아볼 때에도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옷이나 가방, 구두 등과는 달리 향수의 계열은 명확히 구분하기 쉽지 않다. 본래 후각이 비교적 명료치 못한 감각인 탓도 있지만, 다양하고 복잡한 향기를 하나의 통일적인 카테고리로 분류하기에는 ‘어떻게 보면 여기에 들어가야 할 것 같고, 또 저렇게 보면 저기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난점은 체계적인 분류를 찾기 어렵다는 데 있는데, 다음은 통상적으로 많이 언급되는 향수의 계열이다.
Fougere / Chypre / Floral / Fruity / Animalic / Woody / Aromatic / Oriental / Citrus / Gourmand
참고로 일러둘 것은, 향수에 따라서는 해당 분류가 상당히 유의미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의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고전적이고 정형적인 향수일수록 파악하기 쉬울 것이고, 의도적으로 간단하게 만들어졌거나 난해한 향수일수록 분류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또한 여기 언급된 분류는 하나로 충분할 수도 있고, 두 가지가 결합될 수도 있다. 예컨대 프레데릭 말 카날 플라워(Carnal Flower, Frederic Malle)의 경우에는 플로럴이라는 한 가지 단어로 설명하기에 어렵지 않지만, 겔랑 미츠코(Mitsouko, Guerlain)의 경우에는 보통 프루티-시프레로 분류한다. 두 가지 계열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것은, 이 카테고리에는 명백하고 확고한 것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빠져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이다. Animalic이나 Aromatic, Gourmand와 같은 분류는 Fougere, Chypre, Floral과 같은 분류보다 애매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취향을 파악하거나 구입의 가이드라인으로 삼기 위해서는 충분히 유의미한 분류이므로 참고로 넣어두었다.
앞으로는 이들 계열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과 더불어, 각 계열의 대표격인 향수를 추천해보고자 한다. 본인의 취향이 반영된 것도 있고, 계열에 대해 이해하기 좋은 표본으로 인정받는 것도 있다. 우선 첫 번째로 푸제르(Fougere)부터 시작한다.
푸제르(Fougere)는 양치식물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로, 영어의 Fern에 대응한다(펜할리곤스의 향수 '잉글리쉬 펀'에서의 '펀'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푸제르 계열의 향수는 양치식물이 들어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푸제르 계열의 어원은 양치식물에서 온 것이 아니고, 1882년 Paul Parquet가 조향한 “푸제르 로얄(Fougere Royale, Houbigant)”이 그 시초가 된다. 이 향수와 유사한 구조를 취하는 향수들을 일컬어 모두 '푸제르 계열'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푸제르 로얄은 최초로 합성 쿠마린(Coumarin)을 사용한 향수인데, 푸제르 계열의 향수에서 형식상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이 쿠마린이다. '형식상'이라고 한 것은 푸제르 계열이 다음 포스팅에서 설명할 시프레(Chypre)와 더불어 형식을 중요시하는 계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향성 유기화합물질인 쿠마린을 함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향료가 바로 통카빈이다. 따라서 푸제르 계열의 일반적 형식을 도식화하면, 라벤더, 제라늄, 솔잎 등과 통카빈, 바닐라 등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푸제르 계열의 향수들에도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있으므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Lavender/Geranium/Vetiver/Bergamot/Oakmoss/Pine Needle/Woods + Vanilla/Tonka Bean]
푸제르 계열은 시트러스 코롱과 함께 가장 뿌리깊은 남성 향수의 전형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남성용 향수라고 하면 푸제르와 코롱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향수의 명가 겔랑에서도 코롱을 만들었을 뿐이며, 샤넬에서도 남성용 향수가 등장한 것은 '뿌르 무슈(Pour Monsieur, 1955)'가 최초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도 푸제르 계열은 상당히 클래식한 계열에 속하며, 특히나 남성용 향수 중에서도 포멀하고 진중한 느낌을 원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된다.
물론 같은 푸제르 계열이라고 하더라도 그 느낌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세분화될 수 있는데, 주의할 점은 통상 ‘남자 스킨 향’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다수가 푸제르 계열이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화장품에 향을 첨가한 것이기에 그 표현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모호하지만, 라벤더 중심의 전통적인 푸제르 계열의 향일 확률이 높다. 예컨대, “레전드(Legend, Montblanc)”에서 스킨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다면, 푸제르 계열을 스킨 냄새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향수 계열 중에는 대표주자를 꼽을 수 있는 장르가 있는데, 역사성이 짙은 푸제르 계열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기준점이 될 만한 향수를 소개할 수 있다. 푸제르 계열의 기준이 되는 모범적이고 전통적인 향수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그 시초격인 우비강의 푸제르 로얄(Fougere Royale, Houbigant)과 겔랑의 에이미 겔랑이 조향한 지키(Jicky, Guerlain)다. 다만 안타깝게도 두 향수 모두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다. 무려 19세기에 출시되어 푸제르의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두 향수는 통카빈에 라벤더를 중심으로 두고, 시트러스 노트를 위에 올렸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합성 향료를 전격적으로 사용하여 현대 향수의 시작을 알렸다는 의의를 갖는다.
푸제르 장르에서 추천할 만한 향수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최근 국내에 수입되어 판매 중인 MDCI의 '인베이전 바바르(Invasion Barbare, MDCI)'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향수는 상당히 야성적이면서도 포멀하다. 필자는 정식 수입 전 MDCI의 담당자에게 문의하여 본품을 받아보았는데, 해당 하우스에서는 시프레 계열인 '시프레 팔라틴(Chypre Palatin, MDCI)'와 더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 선호도로는 Hermes의 Equipage를 추천한다. 이 향수는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더 이상 수입을 하지 않고 있으나(2019년경 국내 재고를 소진한 후 재입고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최고로 꼽는 남성 향수들 중 하나다. 날카로운 카네이션과 솔잎의 향에 쨍한 알데히드를 덧입히고 오크모스의 깊이를 더한 향수로서 클래식 푸제르의 정수라 부를 만한 향이다.
이외에도 YSL의 Rive Gauche pour homme가 해외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Histories de Parfums의 1725 Casanova도 모범적이라 불리우는 현대적 푸제르다. 한편, 1999년 알뤼르 옴므가 등장하기 전까지 90년대 샤넬 남성 향수를 대표했던 Platinum Egoiste도 푸제르 계열의 향수이며, Montblanc의 Legend와 Penhaligon's의 Sartorial 역시도 많이 소개되었다. 참고로 Caron의 Pour Un Homme de Caron과 Guy Laroche의 Darkkar Noir는 역사적인 푸제르 향수이니 기회가 되면 시향해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