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 멀다면 먼 타향에서 기획관리와 생산관리업무를 맡고 있었던 나는 와이프와 3년의 연애 후 결혼을 하게 되었고 큰 딸도 낳게 되어 어느덧 3명의 가족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기차를 타고 주말마다 고향과 직장을 왔다 갔다 하던 저는 가족이 생기게 되어 작은 중고차를 장만해서 차를 타고 고향을 다녀오게 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거의 매주말마다 고향을 올라가고 다시 직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는 길은 휴일이 끝났다는 아쉬움과
월요일 출근이라는 부담감이 차 안을 가득 메워서 즐거움보다는 피곤함과 적막감이 차 안을 다
차지했었지요.
그런 주말이 싫었던 저는 4년의 타향살이를 끝내려고 사표를 던지고 고향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고향 근처의
회사에 새로운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직장은 신규 사업이라서 그런 지 조직이나 인력구성도 진행 중이었고 시스템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으며 프로세스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황무지였던 공장이었지요.
이렇다 할 고객의 주문이 없어서 그냥 할 일이 없어 노는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처음으로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고객이 납품을 요구한 수량은 1,000대였던 것 같습니다.
1,000대의 주문을 받고 생산계획을 짜고, 자재를 준비하고 생산 라인에서 조립을 하고 포장을 하는데
며칠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일정도 여러 차례 미뤄졌었지요. 생산하려고 하니 준비 안 된 게 있다고 미루고
계획된 날이 오면 또 준비 안 된 게 있다고 또 계획을 미뤄달라고 요청이 왔었습니다.
계획은 하루에 200대씩 5일을 생산하는 계획! 다들 생산해 본 적이 없으니 계획을 여유 있게 짜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해 가면서 아주 느릿느릿 생산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하기야 그때는 작업 매뉴얼도 없었으니까요! 엔지니어가 작업자들 뒤에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면서
설명을 하면서 생산을 했으니까요.
공장에는 큰 공정이 2개가 있었고 제번이라고 하는 것 2개를 전산에 임의의 번호를 따서 제가 만들면 이게
생산라인에서 볼 수 있는 생산계획이 되고, 자재현장에서는 이 제번을 토대로 자재명세서인 BOM을 기준으로 자재를 준비(Kitting)하여 생산하려는 전날 라인에 자재를 출고시켜 주었으며, 생산을 하고 나서는 날짜와 수량대로 생산실적을 사람이 입력할 수 있었습니다.
공장이 생긴 이래로 처음 생산을 하게 되었으니 잘 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순서도 뒤죽박죽 그나마
자동화라고 하는 컨베이어 벨트 생산라인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포장단계에서는 일부 자재가 남아서 테이핑까지 완료되어 팔레트 위에 쌓아 두었던 박스를 전부 다시 뜯고 일일이 자재가 빠진 게 없나 확인하고
겨우 자재가 빠진 박스를 찾아서 남는 포장재를 넣고 테이핑을 다시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일정 수량을 발주해 온 박스이니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다시 해체한 박스를 쓸 수밖에 없었지요.
박스에 테이프가 두 번 세 번 덧 붙여지니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걸 받아본 고객은 얼마나
실망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다행인 걸까 그 제품은 인도네시아로 갔었습니다. ^.^
공장을 지은 이후 첫 번째로 만든 제품이 트럭에 실리고 공장 정문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고
다들 뿌듯해했습니다. 다들 그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까요. 그날 저녁 축하 회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첫발을 내 디뎠으니 조금만 더 보완하고 개선하면 다음에는 더 나아지겠지요.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영업팀 노력의 결실로 고객의 주문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제품의
가격이 저렴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경쟁사보다는 좀 더 좋은 기능을 탑재한 신제품을 만들어 냈던
자랑스러운 개발이었던 것입니다.
주문이 얼마 되지 않을 때는 공장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주문을 처리하느라 십시일반해도
그럭저럭 버틸만했지만 수량이 점점 많아지면서 계획을 짜는데도 정교함을 더해야 했고 계획대로 생산이
되었는 지도 다음 날에 확인하는 작업은 꼭 필요했습니다.
계획대로 생산하지 못하면 남은 양은 다음 날로 이월시켜서 생산해야 했고, 그럼 그다음에 있었던 계획을
더한 수량을 생산해 내든지 아니면 차질이 난 수량만큼 줄줄이 다음 날로 미루든지 해야 했습니다.
우리 회사 영업은 모두들 당시 서울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영업 담당자는 매주 물동회의라는 것을 하면서 담당하는 지역별로 우리 공장으로 출장을 왔습니다. 공장으로 출장 오는 날은 회식처럼 저녁을 거하게 먹고 올라갔지요. 자신이 주문한 제품을 잘 만들어 달라는 부탁도 늘 있었습니다.^.^
시스템이 없던 우리 회사의 사정 상 주문을 공장에 넣은 영업담당자는 공장에서 공유해 주는
엑셀실적 자료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내 물건이 언제쯤 생산이 끝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과 걱정이
상당했으니라 생각이 듭니다.
이 처럼 모든 게 부족한 공장에서 납기를 못 지킬 것 같은 불안감이 들면 서울에 있는 영업담당자는 아예 공장 근처의 호텔에서 며칠간 머물며 자기 물건이 만들어지는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제 옆으로 출근하며
감시 아닌 감시를 하고는 했습니다. 이 놈이 뭐 하고 있고 뭘 챙기고 있나 계속 보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고 자신의 제품이 제 날짜에 만들어지지 않으면 속을 태우는 날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제 날짜에 안 만들어지는 이유는 다양했고 다 어쩔 수 없는 대답들 뿐이어서 화를 내기도 어려웠었지요.
그런 영업담당자들에게 저는 구세주나 팔방미인으로 비쳤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공유하는 엑셀자료를 보고
문제가 예상되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상황이냐를 수시로 물어보고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하다 보니 제가 안 가는 곳이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안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포장라인의 아주머니들 틈에 끼어 당장 출하가 급한 제품의 포장도 돕고, 빨리 공장에서 제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트럭에 싣기 위해 포장이 완료된 팔레트를 제품창고까지 가져다 넣는 작업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누구에게 전화 걸어 이것저것을 해달라 도와 달라라기 보다는 제가 직접 가서 해결하고 오는 것이 속이 후련했었습니다. 제 마음처럼 빨리 일이 진행되지 않아 답답했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에는 일이 왜 이렇게 체계적으로 되지 않을까 하는 불만은 마음에 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어느 날 저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는지 서울에 있는 영업부터 공장에 있는 모든 상사, 동료들에게
어마어마하게 긴 장문의 메일을 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