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좀 거슬러 올라가면 시골에서 자라 대학을 졸업한 저는 운 좋게 누구나 알 수 있는 큰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어서 그런 지 무일푼인 제 주제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영광이었다고나
할까요? ^.^
무일푼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당연히 생활은 여유가 없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래도 서운하다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한 적이 없이 꿋꿋하게 잘 이겨내며 같이 살아주는
와이프가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4년을 다니던 직장에서 결혼까지 하고 나니 배가 불렀던 걸까요? 고향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즐거운 저녁 식사자리에서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하면 고향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오곤 했지요.
무일푼에서 출발해서 4년 신입사원 기간에 모은 돈은 많지 않고 고향은 오고 싶어 과감히(?) 사표를 쓰고
고향에 올라오니 가지고 있는 돈으로 집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2000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웬만한 아파트가 6000만 원 정도 했었고 좋은 층을
골라서 선착순으로 분양을 하고 그랬던 걸 생각하니 미분양도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모델 하우스를 돌아보는데 비교적 평수는 작았지만 너무 괜찮은 아파트였는데 결국 돈이 없어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 후 저는 사택을 신청했습니다. 빨리 무일푼인 신세를 면하고 싶었습니다.
할 수 없이 형편에 맞는 전세 아파트를 겨우 찾아 살다가 그것도 부담이 되어 결국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사택에 운 좋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일반 전세보다 좀 시설이 안 좋긴 했지만 사택으로
이사하는 날은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사한 사택은 복도식이었고 안방, 거실, 작은 방, 화장실이 있는 18평 아파트!
정말 작았습니다.
전셋돈을 절약할 수 있고 이제 우리도 돈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사택에서 눌러 살 생각을 했었지요.
하지만 그런 계획을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 뜨린 건 다름 아닌 사택이었습니다.
어느 겨울 아침 휴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와이프는 처가에 갔었던 것 같고 저 혼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잠에서 문득 깨어 본 거실의 광경은 기절초풍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사택은 거실과 안방을 막는 유리문이 있고 유리문은 레일을 따라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었는데 거실과 안방사이에 낮은 턱이 있었습니다.
아 글쎄 거실을 가득 채운 물이 그 턱을 넘실넘실 넘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지 뭡니까?
깜짝 놀라서 헐레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가서 첨벙첨벙 까치발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대야를 가져다 놓고
정신없이 쓰레받기에 물을 퍼서 대야에 모으고 물을 어느 정도 빼고 나서 수건으로
물기를 없애고 난 후 어찌 된 영문인지 상황파악을 하기 시작했지요.
화장실에서 물이 샌다고 하더라도 그 높은 화장실 턱을 넘어 올리도 만무하고 거실 부엌에서 물이 샌 것 같지는
않고......
혹시나 싶어 바깥에 나가서 수도계량기를 보니 이런 계량기 유리가 깨져 있더군요.
복도식이라 겨울 추위를 이겨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새서 아파트 안으로 물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참 어이가 없더군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연락해서 계량기를 교체를 하고 한숨을 돌렸는데 아래층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 집 천장에서 물이 새는 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여러 번 하고 허리를 연신 숙였지요. 사택이라서 같은 회사사람이라서 그 정도였지
다른 아파트였다면 손해배상도 해달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화장실에 잠자기 전에 수도꼭지를 조금 틀어 물이 대야에 똑똑 떨어지게 하였는데도 또 한차례
깨져서 한 차례 더 계량기를 바꿨습니다. 그때도 물은 여지없이 거실을 가득 채웠지요.
이외에도 아파트의 불편함은 참 많았습니다.
와이프는 제가 보기에 생활력이 참 강했습니다. 힘들다는 내색을 잘 안 했지요.
어느 날 사택의 방이 좁아 보인다고 거실과 안방을 막는 유리문을 터서 없애자고 하더군요. 너무 좁아 보여 답답하다고 하더군요. 제가 유리문과 문을 둘러싼 사각형틀을 보니 틀 주변의 시멘트로 바른 부분을 깨면 문틀이 아주 쉽게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걸 떼어 내면 안방과 거실이 개방되어 엄청 넓어 보일 것 같았지요.
관리사무소에 물어보니 뜯어도 된다고 하더군요. 저는 간단한 일로 치부하고 퇴근 후에 저녁에 금방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오지랖인 저의 회사일은 퇴근시간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고 또 일찍 끝난다고 해도 술자리로 이어지기가 일쑤였습니다.
와이프는 그때 아이를 임신했을 때였습니다. 배가 많이 나왔었지요.
어느 날 저녁 늦게 퇴근해 보니 유리문 틀의 벽지가 떨어져 있고 시멘트가 깨져 나간 게 보였습니다. 와이프가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벽지를 뜯고 망치로 문틀 주변을 쳐서 깨본 것 같습니다.
그걸 보고 임신한 몸으로 무리하지 말라고 퇴근 후에 내가 하겠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의 일은 계속 늦어지고 와이프는 벽지를 떼어내고 문틀을 깨 놓고 나니 보기가 그랬었나 봅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루하루 문틀의 시멘트를 깨 나가더니 결국은 전부 다 깨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내가 할 테니 놔두라고 그만하라고 당부를 하고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에 집에 들어와 보니
아뿔싸 와이프가 문과 틀을 다 떼어 낸 것도 모자라서 문과 틀을 전부 방 밖으로 다 꺼내 놓았습니다.
그 무겁고 큰걸 혼자서 어떻게 들었는지 상상이 잘 안 되더군요.
와이프 왈, 맨날 늦게 퇴근하고 한다고만 하고 언제 될지 몰라서 그냥 본인이 해버렸다고 하더라고요.ㅠ.ㅠ
확실히 생활력 하나는 강한 여장부였습니다.
와이프의 이런 성격과 태도는 제가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무언의 압박과도 같았습니다.
여자인 나도 이렇게 하는데 남자가 되어 가지고 그것도 못 이겨내냐?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저는 지금까지 집에서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와이프 덕분입니다.
다른 분들은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가족인 거 아니냐라는 말씀을 하실 수도 있는데
저희 집은 좀 달랐던 거 같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