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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변 Jan 02. 2024

계약서 함부로 쓰지 말자

법률생활 실전압축꿀팁

제발 계약서를 함부로 쓰지 말자. 

차용증, 변제각서, 등등등 제목은 상관 없다(업계용어로 이런 효력 있는 문서를 통틀어서 '처분문서' 라 한다. 아는 척 하면 돈 받기 쉬울 수도 있으니 외워 두자) 

언제까지 돈을 얼마 갚겠다는 내용이 있는 계약서를 함부로 쓰면 인생이 피곤해진다. 


사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돈을 '줘야 하는' 사람이면 계약서를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바꿔 말하면, 돈을 '받아 내야 하는' 사람이라면 계약서를 무조건 써야 한다. 


대한민국 등록 제34975호 변호사로서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 상 '계약서가 없는 경우'에 돈을 받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소액인 경우에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반대로, 계약서가 있는 경우에는 굉장히 쉬워진다. 계약서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변호사들이 주로 하는 농담 중 유명한 것 중 이런 게 있다(전혀 안 웃길 수 있음 주의).


 "아, 차용증 있는 대여금 소송만 하고 싶다" 

머리 아프고 복잡한 소송들에 치여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주로 하는 이야기다. 그만큼 차용증의 효과는 강력하다. 대여금 소송의 흔한 풍경도 : 차용증을 들고 있는 변호사는 어깨를 쫙 펴고 목을 빳빳이 한 채 기세등등하고, 반대편 변호사는 그저 판사님 용안 눈치 보느라 바쁘다. 


'제.. 제발 저희 쪽 말도 한 번만 들어봐 주세요...'




돈을 줘야 한다면, 계약서 함부로 쓰지 말고 악수만 하세요.


오늘 상담 오신 분은 안타깝게도 돈을 줘야 하는데 차용증을 써줘 버린 케이스였다. 

아아 나는 상담자 분이 가져오신 차용증을 바라보면서, 판사님의 얼굴을 올려다 보는 황변의 모습을 속절없이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포기는 이르다. 자세히 쓰기는 어렵지만 차용증의 내용 중 우리가 충분히 다퉈 볼 만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런 점을 잘 설명했더니 진눈깨비처럼 울상이던 얼굴이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상담에서 다 이야기해 주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많다. 상담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사실 소송전략 대부분인데, 이것만 듣고 '뭐야 쉽네?' 하고 혼자서 해 버리거나(물론 지극히 당연하게도 사건이 산으로 간다) 다른 변호사와 계약하고 "제가 아는 변호사가 있는데요, ~~~라고 하던데요?" 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는 나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게 맘처럼 되지는 않는다. 

일단 불리한 것이라면 양심적으로 다 오픈을 하고, '이런이런 불리한 점이 있는데, 그래도 해 보시려면 제가 열심히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이 자동으로 나불나불댄다. 

유리한 것이라면 또 '이건 몰랐죠? 이거 알려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라는 생각에 신이 나 버린다. 


보통 착수금(변호사비용) 이야기는 상담 말미에 이야기하기 때문에, 만약 나 같은 호구 변호사와 1시간 남짓 상담을 하고 계약을 안 하고 헤어진다고 한다면 사실상 게임으로 치면 거의 보스몹 직전까지 깬 다음에 환불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요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전략을 좀 수정해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생긴대로 살아야지.


다행히(?) 오늘 오신 상담자 분은 이러한 내 충정을 알아 주셨는지 시원하게 계약을 하고 가셨다. 

새해 첫 영업일부터 계약 성공이라니. 2024년은 모든 일이 잘 되려나 보다. 


새로 만든 로고. 이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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