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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Dec 19. 2022

서른다섯 먹고 한 가출

워킹맘 다이어리

어깨에 온 담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 문을 여니 밤사이 내린 눈이 하얗고 차갑게 깔려있다. 전 날 해놓은 설거지 더미를 정리하고 남편의 사과주스를 간다. 켜켜이 쌓인 먹다 남은 분유가 마른 젖병도 분주히 닦는다. 세수보다 설거지를 먼저 하는 나는, 4살 딸과 8개월 된 딸을 둔 워킹맘이다.


감기에 걸린 둘째 아이가 밤새 보채서 불면증 아닌 불면증에 시달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탓인지, 밖에 내린 눈처럼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지 최근 하지 않던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다.


시작은 아침 카톡 읽씹부터다. 아침부터 나는 일산에서 강남으로 출장 갈 일이 있어 카톡 할 겨를이 없었다. 출장은 핑계고 그간 남편에게 쌓인 게 많았던 것 같다. 하루 종일 남편 카톡에 대꾸를 안 한 게 화근이 되어 저녁을 먹다가 싸워버렸다. 부부싸움도 나름 5년 차가 되고 보니 부부싸움은 항상 같은 패턴에, 항상 작은 빌미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학생 때도 해보지 않은 가출을 결심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뚱뚱한 백팩에 정장을 입고 영락없는 출장 가는 워킹맘이다. 어플로 낮에 숙소를 예약했다. 언제쯤 남편에게 내 가출을 통보할까 고민하다가 판교 출장 가는 퇴근길에 카톡으로 통보했다. 평소에는 이런 카톡에는 대꾸 하나 없던 남편이 웬일로 답장을 해왔다. ‘실망이다’, ‘유치하다’ 등등. 예정대로라면 한 사흘은 여기저기 지인 집에 묵으며 집을 비울 요량이었는데, 남편이 예상외로 차갑게 답장을 하니 딱 보아도 집을 더 비우면 부부싸움이 한 해를 넘기며 장기전이 될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알아봐 달라는 취지였지, 이혼을 할 취지는 아니라서 나는 빨리 노선을 변경했다. 그냥 출장 후 집으로 복귀를 했다. 이미 집에 복귀하는 것이 싸움에서 졌다는 의미였지만, 빈손으로 가기 민망해서 이것저것 화해를 할 계획을 짰다.


유치한 농담이 콘셉트였다. 사과를 사서 건네주며 “내 사과를 받아줬네”, 새로 소주를 건네며 “우리 새로 시작하자”, “기분이 저기압이면 고기 앞으로 와”, 과도로 수돗물을 가르며 “여보, 부부싸움은 이 거래” 말하기도 했다. 이런 농담을 건네기 전부터 이미 남편은 마음이 풀려있는 것이 얼굴에 표시가 나고 있었다.


소주를 마시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인데, 남편과 지난번 제주도 가족여행으로 깔아놓았던 숙박 어플에서 계속해서 내가 예약해놓은 숙소 알람이 왔다고 한다. 호스트와 나누는 대화까지 볼 수 있었다. 내 가출을 예견한 남편은 나에게 카톡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더 차갑게 답장을 해서 나를 빨리 집에 오게 할 생각이었다.


하루 자리를 비운 사이 둘째는 감기에 걸렸고, 첫째는 내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 왔다고 나를 꼭 끌어안았다. 서른다섯이나 먹고 한 가출. 시작과 끝이 별로 좋지가 않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한파주의보라고 한다. 너무 춥다. 나도 둘째처럼 독감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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