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결국 사람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네...?"
- 미술은 종종 완전한 정답은 없다며 ‘주관적인 것이 답이다’라는 알 수 없는 대답을 내놓곤 하죠. 주절주절 무어라 말해 놓고, 이제는 당신이 느끼고 생각하라고 하면서요. 미술이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음, 어쩔 수 없는 것이려나요.
잔을 들다 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미술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핵심을 찌르기보다는 그 모서리를 뱅뱅 맴도는 이야기 -라고 그는 자신의 것을 표현하곤 했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는 동안, 그는 잔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잠시 망설였다. 나는 두 모금 마시려던 것을 한 모금만 마시고 한 번 말해보라는 의미로 먼저 입을 열었다. “미술은 정답이 없다잖아요. 그래서 주관적이라는 거 아니에요? 다만 그래서 미술이 낯선 저로선 무어라 말하려니 결국 모를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1+1=2’라는 명확한 명제도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게 미술인 것 같달까요. 3이 나올 수도 있고, 4가 나올 수도 있고. 갑자기 0이 돼버린다거나, 뜬금없이 ‘사과’라는 단어를 꺼내던가요.”
- 맞아요. 어려워요. 그런데... 어렵지 않은 것 같아요.
“어 그런가요?” 무의식중에 답했지만 솔직한 속내는 사실(날것 그대로 표현하자면) ‘그래서 어쩌라고?’ 같은 것이었다. 어렵다, 그런데 어렵지 않다. 정말로. 주관적인 것이 결국 답인 미술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닌가 싶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사과 절반과 오렌지 절반을 맞물려 놓은 꼴의 대답 같았다. 숭덩숭덩 그의 말을 곱씹으며 이것도 저것도 한 데 품으려는 그의 대답이 미술적인 것이 아니었나 제멋대로 생각했다. ‘미술은 어렵다. 그런데 어렵지 않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다 다시 뒤로 돌아와 결국 제자리인 말처럼 느껴져 고개가 살짝 비틀어졌다.
- 그냥. 제가 이 칵테일이 맛있다고 느끼는 것처럼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맛’이란 것도 어떻게 보면 사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정답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특정한 맛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있어도, 그걸 경험하고 판단하는 건 저마다 다르니까요. 마치 미술을 설명하는 어느 정도 객관화된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감상하는 방식은 결국 저마다 다른 것처럼요. 맛과 예술은 그런 면을 닮은 것 같아요.
조금 새로운 시각이었다. 예술의 경험과 맛의 경험이라. 입안에 남은 술의 잔향이 괜히 선연해져서 옅게 입을 달싹였다.
- 술 마시면서까지 어려운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아요. 단순한 질문을 하고 싶어요. 우린 미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 전혀 단순한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역시나. ‘단순한 질문' 하나로 대화가 걸어야 할 길의 경사가 가팔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급하게 끼어들었다. 저도 술 마시면서까지 어려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의 말을 반복하면서.
- 음, 그럼 이건 어때요. “이건 정말 예술이야!”라며 누구나 어렵지 않게 쓰는 감탄사요. 그냥 ‘예술’보다는 조금 더 익숙하지 않나요? 예술 작품 앞보다는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외치는 감탄사로서의 ‘예술’ 혹은 ‘예술적인 것’이요. 저는 지금 약간.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나누는 경계선 위를 가로질러 누워보고 싶다는 발칙한 마음이 들어요. 근데 이런 엉뚱한 엔딩이 나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사실 내가 누운 곳은 예술의 경계선이 아니었다!”
- 그러니까 그렇게 미술을 이해해보겠다는 건가요? “이건 예술이야!”라는 익숙한 감탄사를 경유해서요.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 외치는 ‘예술이야!’라는 감탄사로요. 그렇게 미술과 미술 아닌 것의 경계를 넘고 싶다는 의미죠?
- 네, 우리의 질문은 “우린 미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였고, 그렇다면 익숙한 걸 다리 삼아 다가가본다면 조금은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요. 단순한 생각이죠?
- 근데 독특하긴 하네요. ‘예술적이야’라는 말로 미술을 이해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어요.
- 저도 갑자기 떠올라서 지금 처음 해보는 거예요. 결국 정답이 없잖아요 예술은. 그럼 이런 방식을 한 번 시도해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이렇게 다뤄보자고요.
그나저나 아직 한 모금도 못 마셨네요.
음, 저는 이번에도 어디로 달려나가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방식보다는, 우리 곁에 놓인 것을 다시금 살펴보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지금처럼요. 이걸 마시며 ‘맛’에 대한 분석과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술이 내게 주는 감각과 경험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조금 길게 음미하는 방식으로요. 그렇게 미술을 생각하고 싶어요.
그제야 그는 첫 모금을 마셨다. 저번에 내게 비밀이라며(가만 보면 비밀도 아닌데) 사실 자신은 사람과 대화를 잘 못한다고, 그런 제 성격이 참 밉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는데 글쎄. 말이 퍽 많지 않은가. 아마 지금 저 짧은 순간에도 다음 말을 위해 별생각을 요란하게 하고 있을 것 같은데.
- 와! 이 진토닉 정말 예술이에요. 맛있어요!
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아까 그가 던진 길고 긴 질문이 떠올라 잠시 멍해졌다(그 자체론 짧고 단순한 질문인데. 그에겐 그런 질문도 길고 복잡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님 그냥 주제가 미술이라 복잡한 건가). 같은 ‘예술’이란 단어인데 이토록 뉘앙스가 다를 수가 있나. 뭐 일단은 꽤 좋은 맛의 술이긴 했다. 공간도 좋고. 그의 말대로 ‘예술이었다.’
- 특정한 레시피로 만들어진 술을 ‘진토닉’이라 부르기로 한 거겠죠. 그런데 세상 모든 진토닉이 다 같은 진토닉일까요.
- 아뇨. 정해진 방식이 있어도 사람마다 사용하는 재료나 레시피가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까 완전히 같다는 건 무리지 않을까요?
- 그럼 이 질문은 어때요? 저 바텐더가 만든 진토닉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경험할까요? 같은 사람이 만들었고, 아마 큰 변수가 없는 이상 같은 맛이 날 거예요. 그럼 이 한 잔을 두고 모든 사람이 같은 걸 경험하는 걸까요?
- 아마 맛은 같은 걸 느끼겠죠...? 그런데 그 자체의 경험은 다르지 않을까요. 음, 가령 좋아하는 사람이랑 와서 이걸 마시는 거랑 우울한 기분으로 와서 혼자 마시는 걸 같은 경험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람마다 경험하고 떠올리거나 주목하는 게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모두 동일한 경험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혹시 모르죠. 저희는 맛있다고 하지만, 누구는 이 진토닉이 맛없다고 할지도.
- 저는 왠지 그런 방식으로 미술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더 정확히는 사람과 미술이 그렇게 만나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미술을 두고 길고 복잡하게 얘기한 모든 것이 당신의 말로 비유되고 요약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미술이란 게 있어요. 우리는 이미 알죠. 미술이라 불리지만 그 안에 너무도 다양한 방식의 미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한 명의 예술가에겐 그만의 가치관, 예술관이 있을 거예요. 그 안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거고요. 거기에 이어서 하나의 작품이지만 그걸 보고 사람들이 읽어내는 의미와 겪는 경험은 또 서로 다르겠죠. 저번에 이런 다름의 공존을 ‘틈’이란 표현으로 이야기했었어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사과’를 표현한 세상 모든 작품을 떠올려보세요. 그 작품들을 보고 첫인상에 “사과를 표현한 거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조금 더 다가가면 그 사과들은 모두 같은 사과가 아닐 거예요. 단지 사과뿐이 아니란 거죠. 저마다 다른 의미와 목적, 서사를 지니고 있을 테니까요. 그중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과’도 있고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사과'도 있을 거예요. 우리가 만나는 미술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저 다르고 또 달라서 다채로운 것. 이렇게 표현하니 미술이 조금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 예술가의 관점도, 작품이 만들어지는 방식도, 그리고 작품을 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도 다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미술이란 거죠? 저번에 얘기한 것들도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럼, 주관적인 것이 답이라는 모호한 결론이 어쩌면 미술의 최선일 수도... 있겠네요?
- 최선이라, 그럴 수 있겠네요. 맞는 말 같아요. 근데 한편으론 말이죠. 예술에서까지 정해진 정답을 고집하는 것도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물론 정해둔다는 건 명확하다는 장점과 기능이 있어요. 그렇게 정해진 규칙, 언어, 표현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소통하고 의미를 나눌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무엇이 되든 간에 그 이면에는 여전히 완전한 정답이란 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보편적인 것을 확고히 하려는 세상 사이에서 잊힌 존재들과 이야기를 주제로 불러오는 것이 미술인 것 같다고 얘기했던 것을요. 그런, 그리고 결국 주관적인 존재들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어쩌면 예술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주관적인 것이 답이다”라는 건 어떻게 보면... 가장 명확한 결론일 수도 있어요.
- 흠. 아까 진토닉 얘기할 때는 쉬웠는데. 지금은 또 어렵네요. 뭐랄까 미술의 가치나 의미가 만들어지는 구조?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서로 다르기에 다양하고 한편으론 난해하게 존재하는 것이 미술이라는 건 진토닉 비유를 얘기하며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 정해진 답과 규칙을 통해 소통하는 우리가 미술에 대한 것을 말할 때는 각자의 주관적인 것을 통해 소통해야 한다니. 음...
말을 하다 말 수밖에 없었다. 나조차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길을 잃을 정도로 멋지게 꼬여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더니 꼭 미술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곤 하는 자신을 보는 것 같다며 웃어 버리는 그였다. 그러고는 굳이 지금 바로 완전히 정리하려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천천히 이해하면 뭐 어떠냐며. 모르겠다고 외쳐버려도 아무도 뭐라 안 한다며.
- 그래서 미술은 ‘질문’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질문은 의미를 가두지 않잖아요? 열린 채로 존재하는 게 질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질문은 주관적인 것이었던 것을 다른 이에게 설득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하게 하죠. 그러니까 그 주관적인 존재가 스스로를 성찰하게 해요. 어떻게 보면 인간의 표현과 사유는 질문으로 생동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미술은 형체 없는 것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만의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고민을 긴 역사를 통해 실제로 거치기도 했고요. 아마 그런 노력으로 미술사 같은 학문이 만들어지고 공통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생긴 것일 테죠. 거창하게 학문까지는 아니지만, 당신과 제 대화도 그런 방식으로 생동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 본인이 질문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 아! 방금... 뼈 맞았네요. 맞아요, 다르고 다른 미술 관객들 중에서 저는 ‘질문’을 참 좋아하는, 집착하는 사람이니까요. 계속 그런 관점으로 미술을 이야기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미술은 아직도 질문해요. 언젠가 “미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존재하는 미술을 말했었죠... 새삼 제 관점은 정말 당신이 말한 대로네요. 질문이 참 좋나 봐요, 저는. 사실 덜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마음 같아선 다른 사람 붙잡고 마구 질문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제 미술에 대한 시각을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설득해보려는 언어를 모색하며 이어가는 대화는 즐겁지만 한편으론 조금 머리가 아프기도 해요.
- 그럼 잠시 쉬어갈까요?
머리가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어려운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둘이었는데 대화가 새어가는 건 순식간인가 보다. 아마 어쩌면 미술도 이런 비슷한 과정을 거쳐 어려워진 게 아닐까 싶은 맥락 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 아뇨.
- 네?
- 조금 더 얘기하고 쉬어가요. 머리가 아프지만 지금 딱 흥미로운 지점에 온 것 같아서 마무리하기엔 아쉽단 말이죠.
- 흥미로운 지점이요?
- 그러니까 있잖아요. 미술은 결국 사람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당신과 제가 서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 네…?
잘못 들은가 싶어 별 시원찮은 반응도 못한 채 ‘네’만 반복했다. 마지막 말은 더욱 그랬다. 내가 잘못 들은 단어가 있나. 아니면 그가 빼먹은 단어가 있나.
- 떠올려봐요. 우리가 지금까지 나눈 얘기를요. 서로 다르고 다른 존재는 사람이었고, 같은 진토닉이고 사과지만 거기에 또 다른 의미와 서사를 담아버리는 것도 사람이었죠.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람이었고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에요.
- 그렇네요. 미술은 결국 사람이네요.
나는 맞게 대답을 한 건가 조금 헷갈렸다.
- 반복되는 말이지만. 사람은 ‘사과’를 그저 ‘사과’라며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아요. 단순하게 떠올리지도 않을걸요? 그 단어 앞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가 다를 테니까요. 그 많은 것 중 사과에 주목하게 된 이유도 저마다 다를 거예요. 그리고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죠. 감정, 상상, 문제, 질문, 관념, 메시지 같은 것이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걸 다른 사람들도 감각할 수 있도록 표현한다는 건, 결국 다른 결과물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해요. 같은 지구 위를 산다지만 내가 사는 세계와 당신이 사는 세계는 다르니까요. 저와 당신은 다른 배경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그러기에 당신의 기쁨은 제 기쁨과 다른 형태일 거예요. 기쁨을 이야기하는 언어도 서로 다를 테고요. “기쁨에 대해 그려봅시다”라는 질문을 받으면 분명 서로 다른 걸 그리고 말 거예요.
가만 들어보니 모두 맞는 말 같았다. 사실 애초에 맞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술을 정의하고 창조하는 건 인간이니까. 미술은 결국 사람 때문에 만들어지고 지금껏 존재했으니까.
- 사람은 그런 존재예요. 사과를 보고 ‘이건 사과다’라고 생각을 딱 멈추기엔 무수한 기억과 경험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 더 많은 것을 떠올리고 읽어낼 수 있는 존재. 저부터 그래요. 다른 날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과 진토닉을 마시며 ‘맛있는 진토닉이네’라고 생각하다가도 뜬금없이 오늘 대화를 떠올려 버릴 수도 있을 거란 말이죠. 이유는 단순해요. 오늘 이후로 저는 그런 기억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진토닉이란 것에 저만의 의미를 지금 담아버리고 말았으니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잠시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대화가 멈췄고 그도 자연스럽게 다른 말 않고 핸드폰을 만졌다. 미술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인데, 줄곧 진토닉과 사과 얘기를 하다 불현듯 사람이라는 주제에 불시착한 여행을 한차례 마친 기분이었다. 내가 술에 조금 멍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만, 그저 정말 그런 대화였을지도 모른다. 근데 가만 보면 늘 그랬다. 중간에 어떤 과정이 일어나는지에 상관없이 그와 미술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면 정말 미술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지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분명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미술을 보는 나의 모습을 고민하고 있곤 했다.
미술이 그렇게 된 이유. 그런 이유에 대해 그는 꼭 사람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었다. 아, 혹시 미술에 대한 모든 이유를 사람으로 바라보는 사람인가. 휘적휘적 생각을 흘려보내며 나도 잠자코 침묵을 만끽했다. 얼음이 조금 녹은 진토닉은 여전히 예술이었다.
- 이번 대화는 (2)편에서 이어집니다 -
“사람은 그런 존재예요. 같은 것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는 존재.
그런 사람이 창조하는 게 미술이고 예술이라니까요”
원문 @아트인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