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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은 Jul 30. 2022

how to read lacan하우투리드라캉 5장 발제

초자아적 명령 "즐겨라!": <카사블랑카> 관객으로서의 라캉

5. 초자아적 명령 “즐겨라!” : <카사블랑카> 관객으로서의 라캉

발제자 박상은


 들어가기에 앞서 지젝은 주이상스Jouissance에 대해서 짚고 넘어간다. 

주이상스는 향락Enjoyment로 번역되지만 향락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외상적인 면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쾌락보다 더한,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폭력적인 침입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욕구를 부여하고 그걸 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지켜보면서 즐기는 가학적인 윤리적 작인인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라캉이 향락과 초자아의 등가성을 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즐기는 것은 단지 자발적인 취향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이하고 비틀린 윤리적 의무처럼 행하는 어떤 것이다.”

 위 명제는 라캉이 프로이트를 독해하는 방식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프로이트, 주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작인: 이상적 자아, 자아-이상, 초자아>


 프로이트는 아래의 세 용어를 동일시한다. - “자아 이상 혹은 이상적 자아”, “자아와 초자아(자아 이상)” 그러나 라캉은 이 세 용어들의 기초 짓는 구조화 원리를 통해 명확히 구분한다.

1. 이상적 자아 (상상계-“소문자 타자” 내 자아의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

주체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내가 되고 싶은 모습, 타인이 그렇게 봐주기를 원하는 모습)

2. 자아 이상 (상징계-내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 그로부터 나 지신을 관찰{판단}하는 대타자 내부의 지점)

내가 내 자아 이미지 속에 새겨 넣고자 하는 응시의 작인으로, 나를 감시하고 나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대타자이자 내가 따르고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

3. 초자아 (실재계-내게 불가능한 요구들을 퍼붓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내 실패를 조롱하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이자, 내 ‘죄스러운’ 분투를 억누르고 그 요구들에 응하려하면 할수록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유죄가 되는 그런 작인)

그와 같은 작인의 가혹하고 잔인하며 징벌하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런 구분에 이어 라캉이 주장하는 것은 초자아는 “그 요구가 엄하면 엄할수록 도덕의식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초자아는 도덕의식과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반윤리적인 작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나쁜’ 초자아에 대항하여 ‘좋은’ 자아-이상을 설정하고 환자로 하여금 “나쁜” 초자아를 제거하도록 하여 “좋은” 자아-이상을 따르도록 해야 하는가?

 라캉은 이 모든 해법에 반대한다. 유일하게 타당한 작인은 “욕망의 법”이다. 욕망의 법은 우리로 하여금 욕망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작인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법과 자아-이상(사회 상징적 규범의 망과 주체가 교육을 통해 내면화하는 이상)는 어떻게 다른가?


 라캉에 따르면 우리를 사회적, 도덕적 성장으로 이끄는 자아-이상는 기존의 사회 질서의 ‘합리적’ 요구에 따르게 함으로써, 욕망의 법을 배반하도록 강요한다. 초자아는 욕망의 법을 배반하는 것에 대해 압박을 가한다. 이 압박 아래서 느끼는 죄책감은 환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 초자아가 가하는 압박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배반했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유죄’라는 사실이다.


 즉, 욕망의 법과 자아-이상은 완전히 구분되는 개념이며, 자아-이상이 욕망의 법을 거스르는 순간 초자아는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주이상스에 대한 설명을 본다. 주이상스는 향락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쾌락보다 과해서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이 고통은 초자아를 인식하는 단서가 된다. 초자아와 주이상스를 계속해서 상기하며, 자아-이상과 초자아를 분리하는 간극의 사례를 살펴본다. 아래 사례들 중에는 거대 자본이 투입된 할리우드 영화가 포함되어 있다. 고통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데 어떻게 사례로 쓰이는지를 신경쓰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자아-이상과 초자아를 분리하는 간극의 사례   

커티즈의 <카사블랑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등장인물은 대화를 하고 포옹을 한다. 이어서 화면이 디졸브되면서 3과 1/2초 숏으로 서치라이트가 비치는 한밤의 공항 타워를 비춘다. 다시 디졸브, 등장인물 하나가 바깥을 바라보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3과 1/2초 동안의 공항 숏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섹스를 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재밌게도 영화는 섹스를 했다와 하지 않았다의 의미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표면적 서사 상에서는 영화는 완벽히 도덕적인 규약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잠깐의 쇼트를 통해 또 다른 서사, ‘섹스를 했다’의 서사를 구성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신의 ‘섹스를 했다’라는 상상은 표면적 서사 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그 상상에 몰입할 수 있다. 이런 환상은 대타자에게 포착되지 않는다. 한 명의 관객이 내적으로 분열된 것이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짧은 쇼트 동안 등장인물들은 당신의 감시자(대타자)를 위해 섹스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더러운 환상적 상상을 위해서는 섹스를 했다. 이것은 위반의 구조를 보여준다. 표면상으로는 자아-이상을 작인하지만 내적으로는 외설적인 초자아가 작동하여 대립한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섹스를 하지 않았으니 자아-이상 차원에서는 문제가 없다. ‘이에 반해 또 다른 차원에서 텍스트는 관객에게 “즐겨라!”라는 초자아적 명령을 퍼붓는다. 즉 우리의 더러운 상상의 길을 터준다.’

 관객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섹스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 생각이 역설적이게도 ‘그래도...’라는 부인 체계로서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게 한다. ‘대타자의 눈에는 그들이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음탕한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외관이 문제다. 당신은 수많은 더러운 환상을 가질 수 있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들 중 어떤 것을 대타자가 주목해서 상징적 법이라는 공중적 차원으로 통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이중적 독해는 단순히 상징적 법 차원에서의 타협이 아니다. 법의 관심은 외관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공공의 영역을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더러운 상상을 하는 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의미의 타협이다. 법 자체가 외설적인 보충물을 필요로 하며, 법은 그 보충물로 지탱되는 것이다.’ (130p)


2. 피츠제럴드, <라스트 타이쿤>

 ‘그녀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켄 윌러드와 자는 것을 대신하지. 그녀가 거리를 걸어 내려간다면 그것은 켄 윌러드와 자기 위한 발걸음이고, 그녀가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켄 윌러드와 자기 위한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지.’

 여주인공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행위는 남자와 잠자리를 하기 위한 욕망의 표현으로 비쳐진다. 이와 같은 근본적 금지의 작동은 도착적이다. 직접적인 금지, 검열이 가혹하면 할수록, 그로 인한 부산물은 더욱더 전복적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비난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의도치 못한 도착적 부산물은 상징적 지배 시스템을 실제적으로 위협하기는커녕 그것의 고유한 위반, 그것의 알려지지 않은 외설적 지지대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셰익스피어, <트로일루스와 크레시다>

 상징적 지배 시스템이 외설적 지지대임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은 율리시스이다. 장군들은 8년에 걸친 전투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를 점령하고 파괴하지 못한 실패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때 율리시스가 끼어들어 전통적인 ‘낡은 가치’의 입장에서 그리스의 패배 원인은 모든 개인에게 고유한 자리가 주어지는 중앙 집중적인 위계질서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귀한 계획을 위한 사다리인 위계질서가 흔들리게 되면, 사업은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학교의 학위, 도시의 직업조합, 바다 건너 나라들과의 평화로운 교역, 장자 상속권과 타고난 특권, 연장자의 특권과 왕관, 왕홀, 월계관의 특권도 위계질서에 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원래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극 후반에서 율리시스는 자연적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힘을 시간이라고 얘기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낡은 영웅적 행위는 곧 잊혀질 것이고, 새로운 영웅에 의해 당신의 영광은 스러지고 말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전사의 영광 속에서 계속 빛나기를 원한다면 전쟁에 참여하시오.’

‘시간은 등에 배낭을 메고 있어서 그 안에 망각이라는 구호품을 넣어 다니고 있소. 배은망덕이라는 거대한 괴물 말이오. 그 구호물 나부랭이는 과거의 공적들로서, 시간은 그것이 행해지자마자 집어삼켜서 잊게 만들어버리오.’


 하지만 애매하다. 우리는 낡은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시간과 맞서 싸워야 하는가? 율리시스의 주장을 엄밀히 읽으면 그가 자신의 논증에 독특한 냉소적 비틀기를 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직접적으로 낡은 가치들을 고수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들에 잔인한 조작, 기만, 영웅들끼리의 상호경쟁 같은 외설적인 ‘현실정치’를 추가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조화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더러운 이면, 이 숨겨진 부조화 뿐이다.’


4. 라이너, <어 퓨 굿 맨>

 공중적 법(자아-이상)은 초자아의 외설성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 영화는 동료 군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미 해군에 대한 군법 재판을 다룬다. 군 검사는 행위가 계획살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변호사는 피고가 ‘코드 레드’라 불리는 해군 조직 내의 불문율에 따른 것뿐임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코드 레드’란 해군의 윤리 기준을 어긴 동료 병사를 밤에 은밀히 구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불문율이다. 그 규약은 위반 행위를 묵인한다. 즉 불법적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집단의 단결을 재확인시킨다. 그래서 그것은 알려지지 않아야,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부인한다. 

 그런 규약은 공동체의 명시적 규칙을 위반하지만, 개인들의 집단 정체성을 갖도록 강력히 압박함으로써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집단정신을 구현한다. 명시적 법이 ‘기록’되는 것과  달리 초자아의 외설적인 규약은 본질적으로 말해진다.


5. 코폴라, <지옥의 묵시록>

 커츠라는 인물은 기존에는 볼 수 없는 서구 권력의 필연적 산물이다. 그는 완벽하게 군 권력 시스템(상하 수직 권력관계)를 숙지한 군인이다. 그렇게 군 권력 시스템과 과도하게 동일시됨(그는 탈영하여 원주민을 모아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다.)으로써 그는 군 시스템이 제거해야 하는 과잉으로 변한다. 이것의 궁극적 통찰은 권력은 자기 자신의 과잉을 발생시킨다는 것, 권력은 자신이 맞서 싸우는 것을 흉내 냄으로써 그 과잉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6번 사례를 보기 전에 간략하게 요약하고 넘어간다.

(1) 자아-이상과 초자아는 서로 대립하여 관객을 분열시킬 수 있다. 그로 동반되는 쾌락(초자아)는 관객에게 하여금 주이상스를 준다.

(2) 자아-이상으로 금기된 행위는 도착적이다. 이 금지된 것들의 부산물들은 상징적 지배 시스템을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외설의 지지대이다.

(3) 상징적 지배시스템은 외설적 지지대이다. 자아-이상이 추구하는 조화는 외설적인 ‘현실정치’를 통한 부조화를 통해 지탱된다.

(4) 법(자아-이상)은 외설적 규약의 본질이며, 이것은 초자아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5) 상징적 지배 시스템은 과잉을 낳고, 그 과잉을 제거하려 한다.


6. 호모 사케르

 우리는 권력이 허락하지 않은 채 행해지는 것의 비밀스러운 조작의 영역을 만나게 된다. 2005년 11월 체니 부통령은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은 “우리가 일종의 어둠의 세력처럼 작업해야 하는 것으로 [...]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중 많은 것은 아주 빠르게, 구구한 논의없이 진행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되살아난 커츠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2004년 중반 NBC에서 다룬 관타나모 포로의 운명에 대한 논쟁에서 그들 처지의 윤리적, 법적 정당성에 대한 기가 막힌 주장 중 하나는 “그들은 폭격이 놓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미국의 폭격 목표였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전쟁포로로 살아남은 그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들의 상황이 어떻든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것은 포로들을 문자 그대로 산 죽음의 상태,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죽은 자들의 지위에 몰아넣는다. 그래서 그들은 법의 관점에서 봤을 때 더 이상 고려되지 않은 생명, 즉 아무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는 사람으로서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 자들의 현대적 판본이 된다. 그들은 법의 영역 안에 남아 있는 텅 빈 공간 안에서 행동한다. 

그래서 부시 대통령이 “우리는 고문을 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하면서도 포로 고문을 미국의 이해에 저촉되는 것으로 보고 고문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존 매케인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때 우리는 이런 비일관성을 사회적 자아-이상이라는 공적 담론과 그것의 외설적인 초자아적 보충 사이의 긴장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프로이트적 초자아 개념의 현실성에 대한 증거가 아직 더 필요하다면 이것 또한 그 증거가 될 것이다.


 6번 사례를 통해,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통해서 완벽할 것 같은 법의 영역(자아-이상) 안에도 텅 빈 공간이 존재하며, 초자아는 그것을 파고듦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이 작인들의 관계가 예술에서만 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실제 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록: 아감벤 – 헐벗은 삶nuda vita, 호모 사케르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 

단순히 질서 이전이나 규칙에서 벗어난 혼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규칙이 스스로의 효력을 정지시켰지만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상태, 바꿔 말하자면 배제를 통해 포함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예: 추방령)


헐벗은 삶nuda vita

정치적 역량이 완전히 박탈된 형태로만 정치적 관리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는 역설적인 존재. 주권이 산출하는 예외 상태는 삶을 법적/정치적 질서로부터 재베하는 동시에 포섭하면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저 생존 외에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헐벗은 삶으로 만들어낸다. 시민으로서의 법적 자격이 인정 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죽은 목숨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목숨을 유지하는 삶, 법 자체에 의해서 법적 권리와 능력을 박탈당한 삶.


호모 사케르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 신의 법과 신성한 제의적 살해로부터 배제되었기에 ‘희생물로 봉헌될 수 없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법에서도 배제되고 추방되었기에 그를 죽인다고 해도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존재’다. 그의 존재는 종교적인 차원과 정치적인 차원 모두에서 이중 배제된, 그저 단순한 조에로서의 생명을 지닐 뿐이다. 희생양이 될 수는 없지만 살해당할 수는 있는, 따라서 희생제의도 아니고 살인도 아닌 죽음의 위협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자

(모든 출처: 아트앤스터디, 제8강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 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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