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속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의 디올 컬렉션 영상에서 그녀의 창의성을 비판하는 댓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녀가 재해석한 디올에는 실험 정신은 도무지 찾아볼 수도 없으며 유서 깊은 쿠튀르 하우스를 H&M 과 같은 SPA 브랜드 수준으로 끌어내렸다고 분개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존 갈리아노의 복귀를 울부짖으며 디올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녀가 최근에 보여준 2021년 봄 컬렉션은 어땠는가? 구찌의 미켈레와 같은 유머도 맥퀸과 같은 드라마도 없었다. 오로지 여성의 몸을 편안하게 해 줄 부드러운 드레스와 스커트가 있었을 뿐이다. 존 갈리아노식의 판타지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파도 하나 일지 않는 잔잔한 바다와 같은 시시한 쇼였을 것이다. 게다가 쇼가 진행되는 내내 울려 퍼지는 성가대의 노래는 컬렉션을 우울하게까지 만들었다. 네티즌들의 말대로 키우리는 디올의 장례식을 치르는 중인 걸까?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쩌면 키우리가 제안하는 디올은 ‘창의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주장에 수긍하기 이전에 ‘창의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패션계에서 창의성이란 이제껏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그 중에서도 새로운 실루엣과 색감 등 감각적인 영역에 한정해 정의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다양한 디자이너들에 의해 제시되는 새로운 실루엣과 색감의 패션은 진정으로 새롭게 다가오는가? 그것은 과연 우리의 정신에 충격과 변화를 줄 만큼의 영감을 주는가? 만약 감각적인 영역에 국한된 새로움이 여전히 새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패션 엘리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과거의 패션 관습이 우리의 정신 속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의 몸을 그저 하나의 오브제로만 바라보고 그 위에 기괴한 실루엣과 새로운 옷감과 색감의 조합을 시도하는 낡은 실험 정신 말이다. 그것은 창의성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들에게 행해진 구속이자 폭력이었다. 만약 창의성이라고 하는 단어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정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여전히 과거의 낡은 관습을 답습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은 창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오늘날 패션 영역의 창의성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야 할 것이다. 그 새로운 정의는 과거의 엘리트주의적인 패션 문화에 반대하는 반항적인 정신에서 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몸을 단순히 새로운 실루엣을 구현할 오브제로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과거의 남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발전해 왔던 패션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정신. 그것이 바로 오늘날 ‘패션적 창의성’의 새로운 정의가 되어야 한다.
이런 시각으로 키우리가 그려내고 있는 디올을 다시 바라본다면 그녀의 행보는 굉장히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새로운 실루엣을 연구하는 대신 기존의 여성성을 대표했던 실루엣을(드레이핑과 풍성한 스커트) 다시 재현하되 그 위에 페미니즘이라는 자유의 정신을 입혔다. 그녀는 여성의 몸을 옥죄는 기괴한 실루엣을 탐구하는 대신 여성의 몸을 더욱 편안하게 해주는 친-여성주의적 옷을 연구한다. 그녀는 단순한 패션 오브제로서의 여성을 사회 활동의 주체로서의 여성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껏 진행되어 온 여성해방 패션은 여성을 남성화 시키는, 즉 남성성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 유명한 입 생 로랑의 르 스모킹 패션 사진 속에서 힘 있는 남성 슈트를 입은 여성(남성성) 뒤에 전신을 노출한 채 여성스러운 헤드기어를 쓰고 있는 모델(여성성)은 얼마나 수줍고 무력하게 묘사되어 있는가?)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존중받아야 할 여성성에 대한 가치는 점점 잊혀 가고 있다. 아워 글라스 실루엣과 시폰 드레스로 대변되는 여성성은 나약함의 상징이 아닌 찬양받아 마땅할 아름다운 가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해로 얼룩진 여성적 이미지의 더미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현대 여성의 정신을 발견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키우리의 이런 행보는 과연 이전의 코코 샤넬이 걸었던 혁명적 노선의 뒤를 잇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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