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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Sep 21. 2024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다

[북리뷰] 요시다 슈이치/이명미. 파크라이프. 은행나무. 2015.

 나의 현재 입장은 종전에 품었던 입장에 비해서 특권 받은 입장에 있을 뿐만 아니라 종전에 품었던 입장은 언제나 거짓이거나 미숙한 단계의 지위, 잘못 설정된 방향, 혼란스럽고 빗나간 인식의 지위를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진보의 관념은 불가피한 것이다. 
스탠리 피시. <논증과 권유: 비평활동의 두 기준>. 『현대문학비평론』. 한신문화사. 1994.


 “아쿠타카와 수상작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요시다 슈이치의 『파크 라이프』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막상 대답을 해놓고 보니, 이 소설의 내용이 가물가물하더군요. 꽤나 곤혹스러운 일이 됐습니다.

 이런 경우 꼰대들은 두 가지 행동 패턴을 보입니다. 우선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기 합리화를 생각해 냅니다. 보통 꼰대들은 뇌의 신경가소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지위 보전의 욕구까지 가세하게 되면 ‘나는 틀리지 않았다’ 거나 ‘나는 옳다’는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꼴불견이지만, 자신의 입장에선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라는 꼰대도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이 소설이 최고인 이유’를 재정립하자는 것이 첫 번째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다가’ 가끔씩 제대로 챙겨 먹을 때도 있다 보면, ‘진보’까지는 힘들어도 ‘퇴보’를 늦출 수는 있더군요. 다행히 ‘지금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중늙은이가 됐습니다. 냉정하게 다시 읽어 보고 재평가를 한 뒤, 견해를 수정해야 한다면 바꾸자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어 봐도, “역시 요시다 슈이치!”라는 감상이 크게 바뀌진 않았습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은 문체의 미학이 매력적입니다. 다만 이야기성이 다소 부족합니다. ‘굵직하다’고 묘사하는 사건의 전환은 볼 수 없고, 대체로 인물의 내적 심리 변화의 세밀한 변화를 포착해 내는 것으로 서사를 진행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해봐야, ‘스타벅스 여자’와 우연히 말을 섞었다가 같이 사진전을 보러 가는 정도로 끝나고 맙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상경했고, 그래서 별거 중인 선배 부부의 맨션에서 원숭이를 챙기며 생활하는 정도입니다. 첫사랑 히카루의 결혼소식을 전해 듣거나 3년 전에 첫 아이를 사산한 곤도의 둘째 소식을 전해 듣는 것 정도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당최 서로 얽히지 않는 사소한 사건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열될 뿐인데도, 희한하게 몰입하게 됩니다. 별 것 아닌 일들을 경험하는 ‘나’의 감정선을 꽤나 간결한 필체로 묘사하는데도 제법 섬세해서인 듯합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한정된 진행으로 ‘보이는 대로 묘사’할 수밖에 없지만, 그 묘사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되는 인물들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겠죠. 

 20년 전의 짧은 리뷰를 다시 읽어 봐도, 지금의 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 문체에 있다”라고 단언하며,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문체는 다자이 오사무나 요시모토 바나나를 연상시킨다”라고 봤습니다. 특히나 “호흡이 짧은 문장들은 그만큼 간결하고 가뿐하게 독자에게 다가가기 마련”이란 평가를 봤을 때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미학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자기 방기적일 정도로 관조적인 태도로 ‘나’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나’를 바라보는 세계의 입장에서 ‘나’를 서술한다”는 겉멋 잔뜩 들어간 해석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 “소설의 담론들이 개인적 미시담론에 천착”하다 보니, “진정성을 미덕으로 삼는 리얼리즘 서사의 치열함을 상실”한 일본 서사 문학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비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면서, 전인격적으로 ‘진일보한 인격체인 지금의 나’는 사뭇 다른 감상을 제시해야 할 터였습니다. 무엇보다 서사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성’이란 주장을 펼쳐왔던 최근의 제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이나 도노 하루카의 『파국』을 혹평했던 입장에서 동일한 잣대를 가져올 필요는 있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다 슈이치에 대한 고평가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데요, 그 이유를 좀 차분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문학작품의 두 번째 독서가 첫 번째 독서와는 가끔 다른 인상을 낳는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이에 대한 이유는 독자 자신의 환경의 변화에 있을 수 있으며, 더욱이 텍스트는 이 변화를 그러한 것으로 허용해야 한다. 두 번째 독서를 할 때 잘 알려진 일은 새로운 관점이 나타날 수 있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수정되고 때로는 풍요하게 되는 듯하다는 것이다.”
- 볼프강 이저. <독서과정: 현상학적 접근>. 『현대문학비평론』. 한신문화사. 1994.

 요시다 슈이치가 2002년 제127회 아쿠타가와류노스케상을 수상한 뒤로, 2003년 열림원에서 오유리의 번역으로 이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처음 읽은 것은 그 판본이었으니, 다시 읽은 은행나무에서 출간된 이영미의 번역본과 같은 책이라고 하긴 조금 어려울 듯합니다. 일본어만큼은 다른 언어에 비해 번역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과한 시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그만 차이를 무시하기엔 ‘문학’이란 점에서 가벼이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독서’임을 부인하기도 어려운 터라, 판본의 변화는 무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반응비평의 이론적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의 지적을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을 처음으로 알게 해주는 문학적 경험에는 ‘일종의 경험의 맥락(Erfarungskontext) 속에서 동시적으로 읽힐 수 있게 되는 사전적인 지식’도 포함되는 것”이라 지적하면서, “하나의 문학 작품은 어떤 교시적 진공 상태에서의 절대적 새로움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품의 초보적인 수용이 이미 읽은 바 있는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서 미적 가치의 확인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따라서 야우스의 수용미학에서는 “개별 작품을 그것의 문학적 계열에 편입시킬 것 요구”하며, 이는 “다음 작품이 바로 그 이전의 작품이 남겨 놓은 형식적 원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다시금 새로운 문제들을 제시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 나타난다”라고 보았습니다. 그 과정은 통시성과 공시성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드러낸다고도 분석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번째 독서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진실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볼프강 이저는 “독자가 텍스트로 체험하는 태도는 그 자신의 성향을 반영해 줄 것이고, 이런 점에서 문학텍스트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우리가 독서를 하는 동안 변화된 인상을 경험하게 되지만, “쓰여 있지 않은 텍스트에 반하여 쓰인 텍스트가 부여한 한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결국 우리는 “저자가 이들을 알맞게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들을 적절하게 짜 맞추려고 노력”한다고 정리합니다. 이쯤에서는 스탠리 피시(Stanley Fish)의 견해도 살펴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는 “변화는 언제나 게임 규칙 안에서, 무엇을 성공적인 수행으로 간주하고, 어떤 요구를 내세울 수 있으며, 어떤 절차에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가를 가리는 규정 안에서 생산되고 인지된다”라고 보았습니다. “문학제도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제약 안에서” 비평은 이루어지기에 변화는 전면적이더라도 그 외피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살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저는 여전히 가장 맘에 드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요시다 슈이치의 『파크 라이프』라고 말할 겁니다. 다카세 준코의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이 강력한 경쟁작이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저의 미학적 태도가 더욱 강화된 상태에선 쉽게 변하지 않을 듯합니다. 소설과 같은 서사물에서는 이야기성이 무척 중요합니다.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서사가 갖추어야 할 제1의 미덕입니다. 다만 소설은 문학이며, 따라서 나름의 미학을 갖추는 것이 제1의 미덕입니다. 이야기성을 확보하고 문체의 미학을 정립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만, 둘 중에서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역시나 문체의 미학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읽으면서 쌓아온 경험 지평(Erfarungshorizont)의 압력은 쉽사리 떨쳐내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렇게 궁상맞은 변명을 무안스레 끝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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