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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Sep 30. 2024

옴니버스 앨범식 편집을 고민하다

[북리뷰] 류보선 외 11인. 서울의 인문학. 창비. 2016.

1. 창비의 오만: 독자적 외래어표기법


 창비의 책을 읽닥 보면 짜증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외래어표기법 때문입니다.

 창작과비평사는 문화체육관광부 고시 제2017-14호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창비만의 독자적인 표기법을 따릅니다. 그들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차피 어문 규정은 변화하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같은 로마자(roman alphabet)를 쓰는 언어들이라도, 독특한 음운들이 존재합니다. 한글 자모체계로는 도저히 표기할 수 없는 발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국제음성기호(IPA)를 통해 해당 음운을 비슷하게 발음할 수는 있지만, 한글로 표기할 수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글이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외국어 음운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자의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국립국어원이 주도하는 외래어표기법이 절대적일 수 있는 근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비가 ‘자기 꼴리는 대로’ 표기하겠다고 해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1986년 문교부 고시 제85-11호로 시작한 한국어 어문 규범의 외래어표기법은 영어, 독일어, 불란서어, 서반어어, 이태리어, 일본어, 중국어 7가지로 이루어졌었습니다. 최근 개정된 버전이 2017년 문체부 고시로 21개 언어로 늘어났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정비되지 않아서 한글 표기에 어려움이 있는 언어들은 존재합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해당 언어들 역시 한글과 마찬가지의 문자 언어로 표기된다는 점입니다. 최소음운언어의 경우는 자음 6개와 모음 5개로 이루어진 반면, 최대음운언어는 160개 정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만 해당 언어들은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평균적으로 자음 20여 개와 모음 5개 정도로 표기됩니다. 그래서 국제음성기호 역시 107개의 기본 문자와 52개의 구별기호 그리고 4개의 초분절요소에 그칠 뿐입니다. 웬만해선 각 언어의 독특한 음운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체계를 나름 고안해 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자의성보다는 규칙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고려해 보면 비교적 ‘합리적인’ 한글의 외래어표기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국립국어원을 중심으로 제안하고 있는 외래어표기법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개 출판사의 비전문가들이 짖고 까부는 것”에 비해 국어학자들이 해당 외국어 음운을 심도 있게 고민해서 제안하는 표기법을 부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래어표기법이 제정되었던 초기를 떠올려 보면, 까불 법도 하다 싶어집니다. 

 가장 어이없는 것은 러시아어 표기 세칙이 정립된 것이 2005년이란 점입니다. 동구권 언어의 표기세칙이 1992년부터 생겨났던 걸 살펴보면 의외란 반응을 넘어서 국립국어원의 책임방기가 아니었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1993년 한국일보의 기사에서처럼, 국립국어원(당시는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제안하는 러시아어 표기 용례는 세칙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어심의회 외래어분과위원회에 해당 출판사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어정책에 합리적인 대안을 제공해서 관철시키면 될 게 아닌가 하는 순진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창비와 같은 문화권력이 이런 독불장군 노릇이나 하고 있진 않겠지요. 아무래도 국어정책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꼴 보기 싫은 ‘오만’은 계속될 수밖에 없겠고, 창비의 책을 읽으려면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짜증이 밀려옵니다. 



2. 잘 만든 옴니버스 앨범 vs 가요톱텐 컴필레이션 앨범


 부제인 ‘도시를 읽는 12가지 시선’이란 표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머리말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서울연구원의 후원으로 시작된 ‘2015 서울인문학’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다양한 필진이 단편적인 글들을 싣게 될 것이란 점은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서울의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어떤 주제들을 어떻게 통합할 것이냐의 것이었습니다. 편집위원회에서 주제를 잡고, 그 주제를 잘 다뤄줄 수 있는 전문가에게 글이나 강연을 의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서, 산뜻한 새 글이 서울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융합된다면 더 바랄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편집위원회에서 친분 있는 인사들에게 서울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무언가를 써줄 수 있냐고 제안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자기 복제의 글이 중구난방으로 난립하게 될 겁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최악의 경우가 되겠지요. 책을 읽고 나서 고민해 보니, 앞서 말한 최선의 방식이 적용되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뒤에 말한 최악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어렵게, 꽤나 좋은 글들이 많았고 다룬 주제들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광장의 정치나 랜드마크 정치를 다룬 정치 분야의 주제는 꽤나 마음에 들었고, 남촌을 다룬 도시사학 분야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노인, 청년, 외국인, 교육, 상권과 주거를 아우르는 부동산 문제를 다룬 사회 분야의 주제 의식만큼은 충분히 공유해 볼 수 있는 방향입니다. 기본적으로 서울학이란 학제간 연구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분야를 두루 섭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권할 만한 ‘좋은 책’이었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됩니다. 이를 테면, 누구나가 인정할 만한 옴니버스 앨범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개인의 취향에 머무를 ‘멜론 플레이리스트’ 수준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될 것인지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1984년에 발매된 『우리노래 전시회』와 같은 옴니버스 앨범은 대한민국 100대 명반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본정통 리어카에서 팔던 가요톱텐 순위곡을 컴필레이션 한 불법복제음반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수록된 곡들의 면면이 한심스러웠다고 보기도 어렵고, 단지 불법복제했다는 이유만도 아닐 겁니다. 2000년대 초반 앨범 재킷 자신에 연예인들을 기용하면서 인기를 끌었던 『연가』 시리즈에 어떤 곡이 수록되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들어본 적 없는 『우리노래 전시회』란 앨범에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제발」 같은 곡들이 수록되었다고 하면 깜짝 놀라고 말 테죠.

 여러 아티스트들의 신곡을 모아놓기 때문에 옴니버스 앨범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나중에 발매되는 개별 아티스트의 정규 앨범에서 리바이벌되기 때문에 더더욱이나 잊히기 쉽습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문학상처럼 대상 수상작이 있다면 그 정도가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나 신춘문예 당선작품집 같은 책들에서 개별 작품을 기억하긴 어렵습니다. 몇 해가 지나 꾸준히 활동해서 단편집을 엮어낸 작가쯤 되어야만 그 책을 통해 기억해 낼 테죠. 그런 점에서 이 책과 같은 기획들은 ‘모 아니면 도’가 되기 쉽습니다. 주머니를 뚫고 나온 송곳처럼 정말 뛰어난 글이 화제를 일으켜주는 게 아니라면, 독자의 기억에 남기는 어려울 겁니다. 류보선, 변미리, 김성홍의 글은 앞으로도 자주 인용하게 될 것 같은데요, 책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애먹을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앞서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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